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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손혜원 현상’이 민주주의를 능멸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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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손혜원 의원은 결국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부동산 투기 의혹에 ‘결사항전’하자 지지층이 뭉쳤다. 더불어민주당 탈당 나흘 만에 1만여 명의 지지자가 후원금 연간 한도액 1억5000만원을 채워주었다. 손 의원은 SNS를 통해 “악다구니로 싸우고 있는데 여러분이 저를 울게 만든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불편한 의견도 경청 #선악 가르고 극단적 공격 한다면 #다원주의 부정하는 포퓰리스트 #지옥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됐다

그가 목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자 김대중 전 대통령 유세 이후 최대 규모라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목포가 지역구인 박지원 의원은 손 의원을 “투기의 아이콘”으로 공격하다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역공을 받은 뒤 “나 지금 떨고 있다”면서 꼬리를 내렸다. 지금 진짜로 떨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다원주의를 대전제로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인 대의제의 목표는 되도록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빠짐없이 듣고 반영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플라톤이 옹호한 철인정치의 가파른 산맥을 넘고 집단지성이 숨 쉬는 민주주의의 진경(眞景)을 마주할 수 있다. 피아(彼我)를 선악으로 가르고, 상대를 극단적으로 공격하는 손 의원은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포퓰리스트다. 그러고도 민주주의의 동지일 수 있을까.

손 의원은 대의제의 숙명인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을 회피하려 했다. 친인척까지 동원해 목포 구도심의 건물을 사들인 뒤 국회 상임위 예결소위에서 목포 목조주택 복원을 거론했다.  문제가 되자 “국가에 귀속시킬 것”이라고 했다. 전통문화 유산을 지키겠다는 선의가 있는 만큼 투기 의도는 없는 것으로 믿고 싶다.

이하경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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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왜 하필 손 의원이 사들인 건물, 관심을 쏟는 유산들만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하는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리 복잡해도 이해충돌을 피하면서 목포 근대문화유산 보존·육성이라는 공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투명한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대의제의 이런 핵심 규칙을 어겼고, 민주주의를 흔들고 말았다. 손 의원은 “동지 여러분이 힘을 주셔야 끝까지 광야에 나가서도 승리할 수 있다”며 지지층 결집을 시도했다. 제도를 우회해 지도자와 추종자가 직접 만나는 것은 포퓰리스트의 고전적 방식이다.

그는 탈당 기자회견을 하면서 원내대표를 옆에 세우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대의제의 상징이 “기사 200여 건을 고소하겠다”며 언론에 선전포고를 하는 초선의원의 들러리 신세가 됐다. 민주주의의 중추인 대의제와 언론이 포퓰리스트의 선동 도구가 된 것이다.

손 의원의 언어는 극단적이다. “투기가 사실이면 목숨을 걸겠다”고 한다. 기자가 이해충돌을 추궁하면 “지겨워서 그 얘기는 못 하겠다”고 했다. 언론의 의혹 제기는 “국민을 속이는 가짜뉴스”일 뿐이다. 나의 행위는 선이고, 반대하는 것은 악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이다. 다원주의를 생명으로 하는 민주주의와는 맞지 않는다.

“선의만 있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손혜원 현상’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에서도 비친다. 문 정부는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만든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를 무력화시켰다.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광역단체별로 공공 인프라 사업을 1건씩 선정해 면제하겠다”고 했다.

예타는 지금까지 대형 사업 구상의 36%에 대해 부적합 판정을 내려 141조원의 낭비를 막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4대 강 사업을 ‘삽질 경제’라고 비난한 이 정부가 원칙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지역 균형발전’을 내걸었지만 내년 총선을 겨냥한 선심이다. 친정부 성향 시민단체들까지 반발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 백서에 ‘공명선거 특보’로 등재된 인물을 지난주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임명했다. 자기 팀 선수를 내년 총선의 심판으로 세운 격이다. 인사청문회를 거부했던 야당은 국회 전면 보이콧을 선언해 버렸다. 박근혜가 헝클어 놓은 민주주의를 되살리라고 집권 기회를 주었는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손혜원 현상’은 이 정부에 퍼져 있는 민주주의 경시 풍조의 한 조각일 뿐이다. 손 의원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했다. 2017년 2월 21일 안희정 충남지사가 “그분(박근혜 대통령)들도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과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 발언을 비판한 것이다. 이제 이 발언은 스스로를향해야 할 것이다.

자기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상대방은 무시하는 정치는 민주주의를 능멸하는 포퓰리즘이다. 문재인 정부와 손 의원은 흔들리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생각하기 바란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