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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5시간30분 코미디 단식, 제 무덤 제가 판 한국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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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단식'이라고 앞세우는 바람에…"

25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국회 본관에서 조해주 선관위원 후보자 임명강행 반대 농성장을 방문,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국회 본관에서 조해주 선관위원 후보자 임명강행 반대 농성장을 방문,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4일째 ‘릴레이 단식’ 농성 중인 자유한국당 한 의원의 토로다.

한국당은 지난 24일 청와대의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 임명강행에 반발하면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조 위원이 지난 대선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특보를 지낸 이력을 문제 삼았다. 증인 채택 문제로 인사청문회 개최가 무산되면서 조 위원은 현 정부 들어 인사청문회를 아예 거치지 않고 임명된 첫 사례가 됐다. 그러자 나경원 원내대표는 “좌파독재 저지 및 심판을 위해 국회에서 무기한 단식 릴레이 농성과 국회 일정 거부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치적 중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선관위원이 특정 캠프에서 일했다면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국회 보이콧까지 감행한 한국당 투쟁은 그래서 명분이 있다. 하지만 농성 나흘이 지난 지금, 국민 뇌리에 남은 건 조 위원의 공정성 시비가 아닌 한국당의 블랙코미디 같은 단식 농성이다.

한국당은 단식 농성을 시작한다면서 2교대 방식을 택했다. 오전 9시에서 오후 2시 30분까지 1조, 오후 2시 30분에서 8시까지 2조 등 5시간 3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갰다. 자연히 자기가 맡은 농성 시간이 끝나면 밥을 먹든 죽을 먹든 아무 상관이 없다. 단식이라기보단 조금 늦은 점심·저녁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당장 정치권에선 야유가 쏟아졌다. “웰빙 정당의 웰빙 단식(이해식 민주당 대변인)”, “목숨 건 숱한 단식농성에 대한 모독, 릴레이 다이어트(노웅래 민주당 의원)”, “(평균보다 조금 늦은)딜레이 식사”(문정선 민주평화당 대변인) 등이다. 조 위원 임명에 유감을 표했던 바른미래당마저 “단식 농성의 새로운 버전을 선보인 한국당의 쇼에 어이가 없다"(김수민 대변인)고 꼬집었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나경원 원내대표, 2.27 전당대회 당권주자 및 당원들이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좌파독재 저지 및 초권력형비리 규탄대회'를 갖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나경원 원내대표, 2.27 전당대회 당권주자 및 당원들이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좌파독재 저지 및 초권력형비리 규탄대회'를 갖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논란이 커지자 나 원내대표는 부랴부랴 “단식이라는 용어로 농성의 진정성이 의심받게 된 것이 유감스럽다”고 해명했다. 결국 이날 한국당은 '단식'이란 용어를 쏙 뺀 채 "공식 명칭을 '릴레이 농성'으로 한다"며 "말꼬리 잡기로 야당 투쟁의 본질을 가리지 말라"고 주장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단식'이란 말을 함부로 쓴 단순한 해프닝일지 모른다. 하지만 5시간 30분 식사하지 않고 기껏해야 한 끼 건너뛰는 것을 단식 투쟁으로 포장하려 한 한국당 지도부도,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의원들도 문제의식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농성에 합류했던 한 의원은 농반진반 "투쟁하면서 건강까지 챙겼다"면서 머쓱해 했다. 한 당직자도 "우리 당이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지원 기자 sung.ji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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