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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님과 결혼한 콩쥐,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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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25)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서우(좌)과 문근영(우), 배다른 자매의 갈등이 기본 축이지만 ‘예쁘고 착한’ 혹은 ‘못생기고 악한’ 틀에 갇힌 인물이 없었다. [중앙포토]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서우(좌)과 문근영(우), 배다른 자매의 갈등이 기본 축이지만 ‘예쁘고 착한’ 혹은 ‘못생기고 악한’ 틀에 갇힌 인물이 없었다. [중앙포토]

2010년에 방영되었으니까 벌써 꽤 오래된 작품이다. 자매의 갈등을 독특한 방식으로 그려내 아직도 많은 이가 기억하고 있는 ‘신데렐라 언니’이다. 우울한 정서를 기본으로 장착했고, 각자 사연 많은 인물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느라 고군분투했다.

배다른 자매의 갈등이 기본 축이지만 ‘예쁘고 착한’ 혹은 ‘못생기고 악한’ 틀에 갇힌 인물이 없었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신데렐라가 아닌 신데렐라의 언니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각자의 사연을 심도 있게 다뤘기 때문이다.

신데렐라는 계모와 그 딸들에게 구박받으며 힘들게 살았지만 요정의 도움으로 왕자의 무도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돼 왕자와 결혼했다. 재투성이 누더기는 화려한 드레스로 바뀌었고, 유리구두는 인생역전의 빛나는 상징이 됐다. 그래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말도 등장했는데, 이 용어는 남자 하나 잘 만나 팔자 피기를 바라는 수동적이고 무책임한 여성을 공격하는 최적의 무기가 되기도 했다.

이쯤에서 누구나 떠올릴 만한 우리 이야기가 있다. ‘콩쥐팥쥐’이다. 계모와 그 딸에게 구박받다가 남자 잘 만나 팔자 피는 기본 구조가 동일한 이야기다. 익히 알고들 있듯이 비슷한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 깔렸다.

이탈리아의 체네렌톨라(Cenerentola), 프랑스 샤를 페로의 샹드리용(Cendrillon), 독일 그림 형제의 아셴푸텔(Aschenputtel), 베트남의 떰깜(Tteom and Kkam)·카종과 할록, 중국의 섭한(葉限), 러시아의 부레누슈카, 필리핀의 마리아 등이 모두 신데렐라 부류의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다양한 지역과 문화권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형성 및 향유됐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인간의 삶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착하고 예쁜 여자가 일순간에 팔자 고치는 내용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이 풍부한 상징을 가진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다.

‘콩쥐·팥쥐 이야기’ 어디까지 알고 있니?

부러진 호미로 산비탈 밭을 매야 하는 콩쥐를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소가 도와주는 장면. 우리는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엄청나게 각색된 콩쥐팥쥐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콩쥐팥쥐에 대해 잘 모른다. [중앙포토]

부러진 호미로 산비탈 밭을 매야 하는 콩쥐를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소가 도와주는 장면. 우리는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엄청나게 각색된 콩쥐팥쥐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콩쥐팥쥐에 대해 잘 모른다. [중앙포토]

우리 이야기 ‘콩쥐팥쥐’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우리는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엄청나게 각색된 이야기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콩쥐가 원님을 만나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대요” 하고 끝나는 이야기만은 아닌데, 그 이후 이어지는 내용에 대해서는 현대인의 매우 교조적인 시각으로 인위적으로 삭제한 채 전달한 것이다.

그래서 “‘콩쥐·팥쥐 이야기’ 어디까지 알고 있니”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꽤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경험상 체득했다. ‘콩쥐팥쥐’ 뒷이야기를 전달해 주었을 때 책 좀 읽었다고 하는 분은 대뜸 ‘잔혹 동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잔혹’ 프레임은 역시 현대인의 교조적 시각일 뿐이다.

우선 한번 생각해 보자. 콩쥐가 원님과 결혼한 이후 팥쥐와 팥쥐 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콩쥐만 행복하게 잘 사는 걸로 끝나면 이야기는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일까. 팥쥐는 자신이 욕망하던 대상을 쟁취한 콩쥐를 그냥 두지 않는다. 애초에 콩쥐의 고난은 팥쥐와 팥쥐 엄마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이들에 대해 어떻게든 다뤄야 이 이야기는 논리적 완결성을 갖출 수 있다.

팥쥐는 원님과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콩쥐를 꾀어 밖으로 유인한 뒤 연못에 빠뜨려 죽여 버렸다. 그리고 콩쥐 행세를 하는데 원님은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 본래 오래 함께 산 부인이 머리 모양을 바꾸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남편이 아니던가.

이야기 속에서는 원님이 수상해 하면서 얼굴은 왜 그리 얽었느냐, 발은 왜 그리 작은가,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팥쥐는 원님 오시나 보려고 메밀 멍석에 엎드려 있어서 그렇다는 둥, 문지방에 채여서 그렇다는 둥 적당히 둘러대고, 원님은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고는 그냥 함께 사는 것이다.

연못에 빠졌던 콩쥐는 꽃으로 환생해 피어났고, 원님이 연못에 핀 예쁜 꽃이 맘에 들어 꺾어다 방문 위에 꽂아 놓았다. 팥쥐가 지나갈 때마다 꽃이 팥쥐 머리를 잡아 뜯으니 팥쥐는 꽃을 아궁이에 던져 넣었다. 불을 빌리러 왔던 옆집 할머니가 아궁이에서 구슬을 발견하고 집에 가져갔는데, 구슬에서 콩쥐가 나와 사정 이야기를 다 하고는 원님을 불러 달라고 했다.

옆집 할머니가 원님을 불러다 음식 대접을 하면서 젓가락을 짝짝이로 놓았더니 원님이 밥을 먹으려다가 젓가락이 맞지 않아 잠시 우물쭈물하였다. 그때 콩쥐가 나타나 타박했다. [중앙포토]

옆집 할머니가 원님을 불러다 음식 대접을 하면서 젓가락을 짝짝이로 놓았더니 원님이 밥을 먹으려다가 젓가락이 맞지 않아 잠시 우물쭈물하였다. 그때 콩쥐가 나타나 타박했다. [중앙포토]

옆집 할머니가 원님을 불러다 음식 대접을 하면서 젓가락을 짝짝이로 놓았더니 원님이 밥을 먹으려다 젓가락이 맞지 않아 잠시 우물쭈물하였다. 그때 콩쥐가 나타나 부인이 바뀐 줄은 모르고 젓가락 바뀐 것은 아느냐고 타박했다.

흔히들 신데렐라형 인물에 대해 수동적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왕자님 같은 행운을 맞이한 것은 무도회에 드레스를 잘 차려입고 나타난 신데렐라의 뛰어난 미모가 한몫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신데렐라는 그저 주저앉아 울기만 하지는 않았다. 요정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는 신데렐라에게도 욕망이란 것이 있어, 그것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를 맞이했을 때 기꺼이 몸을 움직여 나아갔다. 그렇게 찾아온 귀한 기회를 진심으로 즐기는 자에게서는 누구의 눈에든 빛나 보이는 광채가 발휘되기도 할 것이다. 요새 흔히 쓰이는 ‘간지라는 것이 폭발한다’ 같은 수사처럼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콩쥐를 들여다본다면 콩쥐는 매우 집요하고 주도면밀한 인물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물 빠진 독 앞에서 그저 한숨만 짓고 있더니 난데없이 두꺼비가 나타나서 도와주었다기보다는, 자신이 겪게 된 시련에 부당함이 존재함을 알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다. 심지어 목숨마저 함부로 빼앗긴 상황이므로 더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고 자신의 위치를 차지한 자의 가면을 벗겨내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짝이 맞지 않게 젓가락을 놓는 방법을 동원했다. 그 덕에 진실을 알게 된 원님은 부당한 방법으로 콩쥐를 괴롭히고 심지어 살인죄까지 범한 팥쥐를 죽여 젓갈을 담가 팥쥐 엄마에게 보내 먹게 했다.

원님이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순간이다. 자신이 맛있게 먹은 음식이 팥쥐라는 것을 알게 된 팥쥐 엄마는 놀라 자빠져 죽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콩쥐는 원님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살았다.

2012년에 만들어진 홍지영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무서운 이야기'의 '콩쥐 팥쥐' 편. 공지 역의 정은채(좌)와 박지 역의 남보라(우), 민 회장 역의 배수빈(가운데)이다. 이 영화는 '콩쥐 팥쥐'의 잔혹한 부분을 극대화해 만든 공포 영화다. [일간스포츠]

2012년에 만들어진 홍지영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무서운 이야기'의 '콩쥐 팥쥐' 편. 공지 역의 정은채(좌)와 박지 역의 남보라(우), 민 회장 역의 배수빈(가운데)이다. 이 영화는 '콩쥐 팥쥐'의 잔혹한 부분을 극대화해 만든 공포 영화다. [일간스포츠]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을 죽여 젓갈을 담그다니. 그리고 그걸 엄마에게 먹게 하다니.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2012년에 만들어진 옴니버스 영화 ‘무서운 이야기’의 ‘콩쥐 팥쥐’ 편은 이런 부분을 극대화해 만든 공포 영화다.

자매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젓갈 모티프를 효과적으로 살리려다 보니 공포영화이지만 말도 안 되게 엽기적인 내용이 되어 버렸다. 젓갈 속에서 눈알이 보이기도 하는 등 잔혹한 이미지들 덕에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 인지도는 얻었으나 작품성 자체로는 아무래도 문제가 됐다. 그러나 그 덕에 ‘콩쥐팥쥐’의 뒷부분 이야기가 새롭게 회자하는 소득 아닌 소득을 얻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욕망 실현에 적극적이었던 콩쥐와 신데렐라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신데렐라와 신데렐라 언니, 콩쥐와 팥쥐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부에선 계모가 등장하고 이로 인해 가족 간에 갈등이 벌어지는 이야기에 대해 요새 안 그래도 한부모 가정도 많고 이혼으로 인한 아픈 사연이 넘쳐나는데, 그런 가정과 아동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며 계모 이야기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형상화한 것이긴 하지만, 오로지 현실의 반영만은 아니다. 정말 전하고자 하는 고갱이는 매우 풍부한 비유와 상징 속에 깊이 숨어 있다. 콩쥐와 팥쥐의 갈등이 단지 팥쥐가 나쁘기만 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차별적인 양육 태도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본다면 팥쥐 엄마에게 가해지는 복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세상의 온갖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상황 속에서 신데렐라와 콩쥐는 희망을 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수동적이고 우울하기만 한 인물이라면 이들은 이야기 속에서 그저 주저앉아 눈물만 흘렸을 것이나, 어쨌든 이들은 움직였고 나아갔기에 기회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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