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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청년 "하버드와 로즈재단, 도전정신 보고 날 뽑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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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심재우
심재우 기자 중앙일보 뉴욕특파원

불법체류자 전락 위기 속 로즈 장학생 된 재미 한인 박진규씨

‘10월에 영국 옥스퍼드로 떠나면 영영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지난 11일 뉴욕타임스(NYT)에 실린 재미 한인 박진규(23·미국명 Jin Park)씨 기고문의 일부다. 그는 지난해 하버드대(생물학 전공)를 졸업하고 ‘로즈(Rhodes)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영국의 로즈 장학재단은 전 세계에서 한 해 약 90명을 선발해 옥스퍼드대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이 장학생이었다.

[심재우의 직격 인터뷰] #2003년 7세 때 일산서 미국으로 #부모가 사기 당해 불법체류자 돼 #오바마의 추방 유예 제도 덕분에 #하버드 졸업하고 옥스퍼드 유학 #“하버드 면접관은 무엇에 도전해 #사회에 뭘 기여할 것이냐 물었다 #이민자 문제 세상에 널리 알리고 #암 치료를 위한 연구 하고 싶다”

박씨가 귀환을 걱정한 것은 ‘다카(DACA)’ 대상자이기 때문이다. DACA는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이 불법 이민자 자녀들을 위해 만든 ‘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 제도’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9월 다카 폐지를 결정했다. 아직은 추방이 유예되고 있지만 언제 현실화될지 알 수 없다. 다카 대상자 80만 명 중 한인은 7000명 정도다. 지난 16일 뉴욕의 한 커피숍에서 박씨와 그의 어머니 김희경(52)씨 만나 그동안의 학업과 NYT 기고 과정 등을 물어봤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 중인 불법체류자 추방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으로 미국에서 화제가 된 박진규씨. 배경은 그가 지난해에 졸업한 하버드대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 중인 불법체류자 추방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으로 미국에서 화제가 된 박진규씨. 배경은 그가 지난해에 졸업한 하버드대다. [AP=연합뉴스]

NYT에 기고하게 된 배경은.
“기고문에 쓴 것처럼 로즈 장학생으로 뽑힌 것은 ‘쓰고도 단(bittersweet)’ 소식이었다. 투표권이 없지만 엄연히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미국인이다. 그런데도 영국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처지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DACA 폐지의 부당함,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기여한 것 등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어머니 김씨는 “진규는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DACA 대상자라는 신분 때문에 겪는 어려운 점은.
“밑도 끝도 없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사회가 워낙 다양해서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DACA 폐지에 따른 문제를 얘기해 주면 많은 사람이 수긍한다.”
어떻게 하다 불법체류자가 됐나. (이 질문엔 어머니 김씨가 답했다.)
“2003년 경기도 일산에서 스킨케어센터를 운영했는데, 주변에서 조기유학 붐이 불었다. 공기업에 다니던 남편과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나뿐인 아들이 좀 더 큰물에서 놀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관광 비자로 들어왔다가 학생 비자로 바꿨고, 이후 영주권 신청을 했는데 사기를 당하면서 불법체류를 하게 됐다.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진규가 학교에 너무 적응을 잘했다. 몇 년을 불법체류자 신세로 지내다 고등학생 때 DACA 대상자가 됐다. 아빠는 일식집에서 주 6일 12시간씩 일했고, 나는 미용실에서 스킨케어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박씨 부모는 일찌감치 뉴욕의 플러싱 지역에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해 렌트비 걱정을 덜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운전면허증을 따지 못했고,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아들의 진로에 걸림돌이 될까 봐 세금을 누락하는 등의 불법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14일자 뉴욕타임스(NYT)에 실린 박진규씨의 기고문.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한 ‘DACA(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 제도)’ 폐지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박씨는 ‘인권을 존중하는 공동의 정체성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기 희망한다. 우리는 동료이고, 친구이자 급우이고, 동료 미국인이다.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일하고, 배우고, 웃는다’고 썼다.

지난 14일자 뉴욕타임스(NYT)에 실린 박진규씨의 기고문.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한 ‘DACA(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 제도)’ 폐지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박씨는 ‘인권을 존중하는 공동의 정체성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기 희망한다. 우리는 동료이고, 친구이자 급우이고, 동료 미국인이다.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일하고, 배우고, 웃는다’고 썼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공립인 수학·과학·엔지니어링 특수목적고(HSMSE)를 졸업했다. 학생 수가 한 학년에 100명 정도로 적어서 성실히 학교생활을 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하버드대 입학생들은 성적·운동·음악에서 월등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 그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비중 있게 봤다. 나한테 뭐가 중요한지, 세상의 문제에 어떻게 도전해 고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문제가 무엇이고 그 해결책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나는 입학하기 전부터 DACA의 문제점을 수백, 수천 명에게 알리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하버드가 그것을 높이 평가한 것 같다.”
DACA 대상자가 아니었다면 하버드대에 들어가기 어려웠다는 얘긴가.
“하버드대는 내게 독특한 점이 있다고 본 것 같다. 나는 이민자 문제를 통해 세상의 다른 면을 알게 됐다. 물론 DACA 대상자가 아니었다면 뭔가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나만의 다른 색깔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대학이 나 자신을 치장할 무엇을 준다는 것은 틀린 생각이다. 하버드대는 세상에 나가 어떤 일을 할지를 고민해 온 학생에게 높은 점수를 준다.” (어머니 김씨는 “요즘 한국에서 ‘SKY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라고 하던데 우리가 계속 한국에서 살았다면 진규가 흔히 ‘스카이(SKY)’로 흔히 불리는 명문대에 가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진규가 그런 주입식 교육과 극한의 경쟁을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버드대 내에서도 빈부 격차가 상당히 있다고 들었다.
“부모님이 부자인 친구들의 파티가 따로 있긴 한데, 딱히 참여를 안 해봐서 잘 모르는 세상이다. 하버드에서는 일단 합격만 하면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각종 복지와 장학금 제도가 잘 돼 있어 한 번도 돈을 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빈부 격차를 느껴보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 와서 술 마신 적도 없고 파티 한번 안 해봤다. 여자친구도 없다. 연애할 시간에 유튜브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나의 롤모델이다.”
세상에 어떤 도움을 주고 싶나.
“현재 전공은 생물학이다. 앞으로 의대에 진학해 기초과학을 연구하면서 암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현재 매사추세츠공대(MIT) 암센터에서 연구를 돕고 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과학 밖의 세상이 크다고 생각해 옥스퍼드대에서 다양한 것을 공부하고 싶었다. 옥스퍼드에서는 글로벌 보건과학, 이주학 석사과정을 밟을 계획이다. 조만간 하버드대 의대 합격자 발표가 난다. 합격하면 입학을 연기하고 옥스퍼드로 떠날 생각이다. 3~4년 뒤 다시 돌아와 의대를 마치고 싶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 지난해 5월 하버드 졸업식에서 학생대표로 연설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당시 우리의 재능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쓰자고 말했다.”

로즈 장학재단은 지난해 11월 박씨를 DACA 대상자로는 처음으로 장학생으로 뽑았다고 밝혔다. 재단 측은 “특히 박씨는 2017년 DACA 신분 때문에 자격 조건에 미치지 못했지만 하버드대의 공식 추천을 받아 지원했고, 결국 2018년 선정의 영예를 안았다”며 “박씨의 훌륭한 지원서가 선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로즈 장학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2500명 이상의 학생이 지원해 32명이 선정됐다. 하버드대에서는 박씨를 포함해 두 명이 뽑혔다. 하버드대와 로즈 장학재단은 공동으로 변호사팀을 꾸려 박씨가 미국에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아무래도 학부 과정에서 과목별 시험을 준비할 때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준비가 안 되면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대를 가려면 성적이 중요하다. 그런 노력 덕분에 전 과목 평점을 4.0 가까이 받을 수 있었다. 꼭 의대 때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좋았고, 성적을 잘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시간을 더 많이 썼다. 힘들 때마다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어머니한테 전화해 당장 해법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는 마음을 편하게 하는 ‘플랜 B’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보스턴 소재 공립 고등학교 교사를 트레이닝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이어 드림즈(Higher Dreams)’라는 사회적 기업을 차렸다. 친구 2명과 함께 2주에 한 번씩 보스턴 28개 공립학교에 간다. 거기에서 학생들에게 대학 가는 방법,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준다. 하이어 드림즈 덕분에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백악관에도 가 봤다.”
DACA 대상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까지 겪은 경험과 스토리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미국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 부모는 누구이고, 어떤 커뮤니티에서 왔는지 등을 말할 수 있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의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법체류자들은 미리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길은 찾으면 있는데, 미리 접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의 결과만 보고 ‘우리도 해볼걸’이라고 아쉬워 하지만 이미 결과는 나오고 끝난 상황이 된다.”
플러싱 거리의 떡볶이 냄새가 그리울 것이라고 기고문에 썼다.
“나에게는 한국이 아니라 뉴욕 플러싱이 고향이다. 플러싱에 사는 한인들 또한 소중한 존재들이다. 뉴욕이나 캘리포니아 때문에 이민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플러싱의 미래는 나의 희망이기도 하다. 앞으로 의료 재능을 이민자들의 건강과 복지 관련 정책을 향상하는 데 활용하고 싶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지만 아직 먼 꿈이다.”
한국의 학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NYT에도 썼지만 내가 잘나서, 똑똑해서가 아니라 좋은 부모님을 만났고, 좋은 공립고교가 있었고, 뉴욕시의 좋은 병원 시스템 등에서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는 정말 똑똑한 학생이 많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공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뭐가 중요한지,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보면서 자기 장래, 자기 학벌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 김씨는 “미국에서 살면서 자녀를 학원에 보내놓고 손 놓는 부모를 많이 봤다. 그러면서 자녀와 대화가 단절됐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자녀와 많은 부분을 공유해야 한다. 과보호가 아니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진규는 그렇게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수학을 싫어했다. 그런데도 아이의 관심사를 같이 얘기하면서 공부와 사회에 흥미를 갖게 했다. 한국의 부모들이 아이의 성적만 따지지 말고 정말 아이 입장에서 생각했으면 좋겠다.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는 부모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박씨는 조만간 미국 의회에서 열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연설을 현장에서 보게 된다. NYT 기고문을 읽은 그레이스 멩 하원의원이 그를 초청자 명단에 올렸다.

심재우 뉴욕 특파원

※ 박다윤 뉴욕중앙일보 기자가 인터뷰와 기사 작성에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