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 “정부가 국민 노후자금을 기업 통제에 쓰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예의주시하고 있지요. 내부적으로 대응 방안을 준비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도 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문 대통령 ‘국민연금 발언’ 파장 #재계 “주주권 행사 지침 주나” 동요 #전문가들도 연금사회주의 우려 #“기업이 경영 투명하게 하라는 뜻” #일부선 원론적 의미 발언 해석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열린 23일 오전 한진그룹은 초긴장 상태였다. 이 회사 관계자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다”며 말을 아꼈다.

이날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해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할지를 논의했다. 3월 주주총회에서 임기가 끝나는 조양호 회장의 연임을 반대할지 말지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가 종료된 이후 업계에는 “9명 중 다수가 연임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진 관계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관련기사

하지만 이날 오후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자 분위기는 뒤바뀌었다. 문 대통령은 공정경제 전략회의에서 “앞으로도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위법에 대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재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쯤 되면 수탁위 결과가 문제가 아니다”며 동요했다. 연금사회주의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왔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침을 준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한진은 바로 숨죽였다.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건 결국 한진에 대한 주주권 행사를 하라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설명이다. 이미 짐이 무거운 한진의 고민은 깊어졌다. 한진은 그동안 3월 주총에서 표 대결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우호세력을 추가로 확보할 방법을 논의해 왔다. 한진칼 지분 구조는 조양호 회장 일가가 28.93%, KCGI가 10.71%, 국민연금이 7.34%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최근 대기업과의 간담회 등을 통해 ‘친 기업 정책’에 무게를 싣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 이 같은 발언이 기업 활력을 제고한다는 최근의 행보와는 방향이 다르다. 대통령의 말에 정책 기조가 흔들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국민연금을 담당하는 보건복지부가 대통령의 강도 높은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경제가 살아날 기미도, 일자리가 확대될 기미도 쉽게 찾기 힘든 시점에서 기업을 흔들고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대통령이 국민연금의 운용 방향에 100% 가이드라인을 준 것이라 논란의 여지가 크다”며 우려했다.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스튜어드십을 행사하게 되면 국내 주요 기업은 대부분 국민연금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국민연금은 지분율 5% 이상 또는 보유 비중 1% 이상 투자기업 중에서 일정한 기준을 두고 ‘중점관리 대상 기업’을 선정할 예정이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 중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수사를 받는 ‘나쁜 기업’이 대상이다. 현재 검찰 수사를 받거나 공정위원회 조사를 받는 기업 상당수가 국내 주요 그룹의 계열사다. 정부의 타깃이 되면 주총에서 큰 홍역을 치를 가능성이 있다.

이날 각계에서는 문 대통령 발언의 행간 읽기에 분주했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은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는 공정경쟁이라는 큰 틀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언급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본부장은 “국민연금은 이와 별개로 주주권 행사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욱 한국경영자총협회 사회정책본부장도 “기업이 경영을 투명하게 하라는 원론적인 의미의 발언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보다 강한 목소리가 나왔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이 국민연금에 의결권을 위임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국민의 노후 자금을 국가가 기업 통제 수단으로 악용할 가능성을 열어준 발언”이라며 “연금사회주의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연금사회주의는 정부가 국민의 돈으로 대기업 지분을 사들여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이다.

전영선·곽재민·문희철·오원석 기자 azu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