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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서른셋 지은희 롱런 비결은 ‘캐디와 롱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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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지난해 3월 KIA 클래식에서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 지은희(왼쪽)와 캐디 마틴 보제크. [AFP=연합뉴스]

지난해 3월 KIA 클래식에서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 지은희(왼쪽)와 캐디 마틴 보제크. [AFP=연합뉴스]

2007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상금이 많아지면서 전문 캐디가 등장했다. 이전까지는 ‘아버지’ 혹은 ‘아는 오빠’가 캐디를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캐디 한 명의 이름이 지은희였다. 현재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뛰는 지은희(33)와 동명이인이다.

과거엔 가족, 요즘은 전문 캐디 #캐디와 선수는 하나의 생명체 #LPGA 1년 이상 가는 캐디 드물어 #지은희 현재 캐디와 6년째 호흡 #이유 있는 한국 선수 최고령 우승

캐디 지은희씨는 안선주의 가방을 멨다. 당시 KLPGA 투어의 빅3는 신지애(31)·안선주(32)·지은희였다. 세 선수가 거의 매주 챔피언 조에서 함께 경기를 치렀다. 따라서 두 명의 지은희가 한 명은 선수로, 한 명은 캐디로 나서는 일이 잦았다. 지은희 선수는 캐디 지은희씨를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12년 전 KLPGA 투어를 주름잡던 ‘빅3’는 30대가 된 요즘도 잘 나간다. 신지애는 지난해 일본 투어 대상 1위, 안선주는 상금 1위를 차지했다. 30대로 들어선 지은희는 올해 LPGA투어 개막전에서 우승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국내 첫 전문 투어캐디 지은희씨는 골프계에서 보이지 않는다. 선수 지은희는 “지은희 언니와 연락한 지 오래됐다”고 했다.

LPGA 투어에서 일하는 캐디들은 불만이 많다. “PGA 투어 캐디보다 수입은 5분의 1도 안 되는데 해고되는 경우는 10배나 많다”고 푸념한다. 이 숫자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LPGA 투어 캐디의 해고율이 PGA 투어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시즌 최종전에서만 아리야 주타누간(태국), 렉시 톰슨(미국) 등 여러 선수가 캐디를 해고했다. 랭킹 1위를 달리는 선수들도 캐디를 바꿨다.

LPGA 투어 선수들이 자주 캐디를 해고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상금이 많아 풍족한 PGA 투어보다 LPGA 투어가 각박한 편이다. 오랫동안 함께 할 가치가 있는 뛰어난 캐디는 수입이 좋은 PGA 투어에 더 많다.

다른 해석도 있다. LPGA 투어의 한 캐디는 “PGA 투어에서는 캐디와 에이전트 등을 한 팀으로 본다. 한 번 고용하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웬만하면 실력을 키워서 함께 발전해나가는 식구로 생각한다. 그러나 LPGA 투어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PGA 투어의 선수들과 관계자들이 인격이 더 훌륭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PGA 투어의 역사가 더 긴데다 오랜 경험이 쌓인 결과라고 생각된다. PGA투어에선 캐디를 자주 해고하는 것 보다는 한 팀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일반적으로 캐디를 오래 쓰는 선수들이 잘 된다. 서로 신뢰하기 때문에 위기에서 강하고,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8년간 함께 한 캐디를 위해 눈물의 파티를 열어준 최경주(49), 한 번도 캐디를 바꾸지 않은 박인비(31) 등이 그렇다.

지은희도 캐디를 잘 해고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현 캐디 마틴 보제크(미국)는 2013년 하반기부터 함께 일했다. 지은희는 “선수 출신이라 코스 매니지먼트 능력이 뛰어나고 코치 경력도 있기 때문에 스윙을 봐주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지은희는 현 캐디인 보제크 뿐만 아니라 다른 캐디와도 평균 1년 넘도록 함께 했다. LPGA 투어에서는 한 선수와 1년을 버티는 캐디를 보기는 쉽지 않은데 지은희는 그렇지 않은 경우다.

지은희는 “캐디를 바꾸면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해서 복잡하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캐디를 안 바꾼다”며 “캐디에게 까다롭게 구는 성격도 아니다”라고 했다. 지은희도 캐디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경우가 있었겠지만 참았을 것이다.

그는 또 “오래되면 어느 정도 익숙하니까 편하게 하려고 하고 대충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캐디도 있는데 지금 캐디는 그렇지 않다. 매년 가는 익숙한 코스라도 언제나 열심히 새로 배우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딱 지은희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은희는 10년 넘게 LPGA 투어에서 활약하면서도 항상 도전하고, 배우려 한다. 스윙만 해도 10년 넘도록 교정하고 있다. JTBC골프 박원 해설위원은 “지은희 선수는 항상 골프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고, 몸 관리도 잘한다.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으면서 의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짜고, 필요하면 스스로 채찍질도 하면서 해가 지도록 연습하는 자세가 10년이 넘도록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자기 관리의 표본”이라고 말했다.

지은희는 한국 선수 LPGA 투어 최고령 우승 기록을 세웠다. 그 기록인 32세 8개월은 최고령이란 타이틀을 붙이기엔 너무나 젊다. 한국 여자골프 선수들의 조로 현상을 보여주는 숫자다. 지은희가 자신이 세운 이 기록을 오랫동안 깨고, 깨고 또 깨주길 기대한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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