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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기 논란, 안방 여론 챙기는 게 다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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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는다. 전투는 이기고 전쟁에선 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현재 한·일 간에 벌어지는 이른바 초계기 논란이 그럴 수 있다.

일본이 신경 쓰는 건 한국 여론 아닌 국제 사회 #논란 이슈화해 전범 국가 지우며 미·일 공조 부각

당초 국방부의 대응은 ‘로우 키’였다. 물밑에서 일본에 성실하게 설명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 측이 작심하고 공세로 나섰다. ‘레이더 조준했다’(일본)→‘초계기가 위협 비행’(한국), ‘레이더 탐지음 공개할 것’(일본)→‘일시, 방위, 주파수 특성 다 공개하라’(한국) , 이른바 레이더 탐지음 공개(일본)→“정체불명 기계음”(한국) 등 장군멍군이 계속됐다.

군 입장에선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게 여론전이었다. 그냥 놔두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니 끊어줄 필요가 있어서다. 여론전은 정무적으론 대단히 중요하다. 한·일 관계를 소극적으로 다뤘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론 관리 실패에 따른 정치적 부담은 고스란히 청와대로 간다. 그런데 이런 국내 여론전은 사실 그다지 어렵지 않다. 군의 발표가 무엇이건 국민 정서는 이를 믿고 듣고 일본을 지탄할 자세가 돼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여론의 지지를 받아 안방 전투에서 이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일본은 한국 여론을 상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이 공격적으로, 공개적으로, 집요하게 나선 건 국제사회와 미국을 향해서였다.

먼저 일본이 한국군과의 갈등을 놓고 국제사회에 심판을 봐달라고 이슈화할 때 그 전제는 동등한 군 대 군의 관계에서 판단해 달라는 게 된다. 그런데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군 전쟁포로를 참수하고 여성을 군인들의 성노예로 삼았던 전범국가였다. 그래서 정식 군대를 갖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자위대’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간 군사적 갈등을 부각할수록 자위대라는 말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과거사의 흔적을 지우는 효과를 얻는다.

두 번째로, 공교롭게도 일본이 문제 삼는 한국 해군의 구축함은 북한 선박과 함께 있었다. 일본 주장대로라면 북한 배엔 호의적이었던 한국 군함이 일본 군용기엔 무기를 겨눈 게 된다. 이는 국제사회에서‘남북 대 일본’의 프레임으로 비칠 수 있다. 지난 7일 일본 자민당 내부 회의에서 “한국군이 유엔 제재 결의를 어기고 북한과 접촉하다가 일본 초계기에 적발된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동북아 한·미·일 안보 공조에서 한국은 이탈하고 있으니 미·일 공조로 가야 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세 번째로, 아베 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까지 염두에 둔 중장기 전략을 짜고 있을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는 대가로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했다. 북한이 ‘북한 비핵화’의 대가로 요구하는 ‘한반도 비핵화’엔 외교적·군사적·경제적 체제보장이 모두 포함돼 있다. 외교적 체제보장이 북·미 수교라면 경제적 체제보장은 대북 제재 해제다. 군사적 체제보장은 주한미군의 역할 중단이다.

그런데 미국 입장에선 주한미군을 대신할 보험을 이미 들어놨다. 현해탄 건너에 주일미군이 있다. 아베 정부가 한국군과의 갈등을 집요하게 제기할 수 있었던 자신감은 주한미군은 없고 주일미군은 있는 미래를 봤기 때문은 아닌가.

국내 여론을 움직여 일본을 때리면 시원하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일본은 한국 여론에 주눅이 들 만큼 만만한 나라가 아닌 데다 일본 여론도 한국 때리기로 결집했다. 무엇보다 진짜 싸움은 한국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다. 동북아 안보에서 일본의 위상은 계속 커지고 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진실 게임’에 나섰다고 봐야 한다.

일본과의 말싸움에만 몰두하면 우물 안 개구리식 인식이다. 더 중요한 건 급변하는 동북아 안보에서 한국의 자리를 지켜내는 일이다. 미국이건 일본이건 동북아에서 한국 없이는 안 된다고 여기도록 만드는 게 이런 진실게임 공세를 막는 근본적 해법이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