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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시장의 광장’ 아닌 ‘시민의 광장’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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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상재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부디렉터
이상재 복지행정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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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독일 베를린 출장을 다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베를린 국회의사당 벽면에 남긴 ‘낙서’가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의사당 리모델링을 지휘한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낙서를) 그대로 남겨두자”고 결정한 것이다. 이제 그 낙서는 역사 유산이자 관광 상품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주도한 ‘한양도성’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예비심사 때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 서울시가 바윗돌 곳곳의 아이들 낙서를 지우려고 하자 심사위원들은 “그것도 역사”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서울시가 21일 ‘새로운 광화문 프로젝트’ 당선작을 발표했다. 지난해 7월 시민·전문가 150여 명으로 구성된 ‘광화문위원회’가 발족하고 나서 처음으로 구체적인 밑그림을 제시한 것이다. 서울시는 두 개의 사진을 제시하며 당위성을 강조했다. 먼저 1974년의 광화문이다. 장검을 든 이순신 장군 동상이 10.5m 좌대 위에 서 있다. 왕복 16차선 도로에 횡단보도가 없다. 개발연대의 시대였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국제공모설계 당선작 ‘깊은 표면(Deep Surface)’ 조감도. [뉴시스]

새로운 광화문광장 국제공모설계 당선작 ‘깊은 표면(Deep Surface)’ 조감도. [뉴시스]

다른 하나는 2009년 9월 오세훈 전 시장이 만든 모습이다. 차도 사이에 조성돼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비판에 시달린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이명박 전임 시장의 청계천 복원과 비교되면서 ‘오세훈 강박증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의 그림은 어떻게 다를까. 육조거리와 월대(月臺·궁궐 앞에 놓는 넓은 단) 복원, 의정부 터 발굴을 통해 역사성을 되찾는다. 지하엔 대형 역사(驛舍)와 시청부터 동대문에 이르는 4㎞ 보행길을 만든다. 총 1040억원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순신·세종대왕 동상 이전 논란, 교통혼잡 우려 등이 제기되면서 벌써부터 부정적 여론이 들끓고 있다. 그런데도 2021년 완공을 못박았다. 오세훈 전 시장이 지방선거 직전에 내놓더니 박 시장도 역시나 2022년 대선 전년도에 맞췄다.

이런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먼저 시간표를 짜고, 여기에 맞춰 결론을 낸 탓으로 보인다. 성공한 건축 프로젝트 조급증, 대선 치적 쌓기용이라는 비난이 나온다. 박 시장은 “시민과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말하지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박 시장은 새 광장에서 대선 후보 연설을 하는 상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조급증, 이런 정략으론 ‘시장(市長)의 광장’만 만들 뿐이다. 무조건 과거 지우기가 아니라 기억과 기록, 참여를 쌓는 것부터 시작해야 ‘시민의 광장’이 된다. 720억원을 들인 광장 바닥돌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충분한 여론 수렴 없이 2021년에 매달려 서두르면 다음 시장이 또 수천억 원의 삽질을 할 게 뻔하다.

이상재 복지행정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