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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싱가포르의 실수, 베트남의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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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해 11월 27일 미국 백악관 오벌오피스에 트럼프 대통령과 워싱턴포스트(WP) 기자 두 명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는 WP 기자에게 불쑥 트럼프가 한마디 했다. “자네들, 김정은이 내게 보내온 엄청난 친서를 한번 보지 않겠나?” 친서를 꺼낸 트럼프는 “저쪽, 소파에 앉아서 천천히 보게나”라고 했다. WP 기자들이 친서(지난해 9월 말 아베 일본 총리에게 자랑했던 친서일 공산이 크나 그 이후에 온 비공개 친서일 수도 있다)를 보고 있는 동안 오벌오피스에는 많은 이들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트럼프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중간중간 WP 기자들을 향해 “어때, 너무 멋있지?”를 반복해 외쳤다고 한다. 뭘 뜻하는가. 일국의 지도자의 친서를, 그것도 평소 ‘가짜 뉴스’라 맹비난하는 WP 기자에게 자랑하며 보여준 트럼프의 행위는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트럼프다. 충고하고 말려도 소용없다. 북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 큰 문제다.

또다시 트럼프식 ‘날짜 박고 짜맞추기’ #미국 얻을 것 얻고 빠지면 우리만 곤경

‘2월 말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예상됐던 수순이다. 누구보다 트럼프가 간절히 원했다. 셧다운이 한 달을 넘어섰다. 경제지표들도 심상치 않다. 트럼프에 직격탄이 될 뮬러 특검의 수사 발표도 임박했다. 지지율은 39%까지 곤두박질쳤다. 뭐라도 좋으니 ‘승리’가 필요한, 긴박한 상황이다.

문제는 ‘실패작’이었던 싱가포르 회담 때와 현 상황이 판박이란 사실이다. 당시 트럼프가 날짜를 ‘톱다운’으로 못 박은 뒤 뒤늦게 성 김-최선희 실무 라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두르는 미국에 느긋한 북한이 양보할 리 만무했다. 이번에도 뒤늦게 비건-최선희가 스웨덴 산장에 박혀 머리를 맞댔고, 앞으로도 몇 번 더 맞대겠지만, 결과는 크게 다를 리 없다. 이미 주도권은 북한이 쥐었다. 백악관을 찾은 김영철의 삐딱한 자세가 그걸 상징한다.

트럼프는 싱가포르에서 1)과거보다도 못한 합의문 수용 2)연합군사훈련 일방 연기 3)주한미군 철수 의향 발설이란 ‘3대 실수’(소신일 수 있다)를 했다. 두고두고 화근이 됐다. 워싱턴 조야에선 벌써 트럼프의 ‘베트남 3대 우려’가 거론된다. 1)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포기 대가로 대북 경제제재 대폭 완화 2)3월 예정인 ‘키리졸브’ 한·미연합훈련 무기 연기 3)핵무기·핵연료 추가 생산 동결 대가로 종전선언 및 대북 연락 사무소 설치 수용이 그것이다. 미래의 핵만 동결하는 ‘가짜 비핵화’에 ‘진짜 면죄부’를 주는 나쁜 딜이다. 사실 미 국무부팀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경계하고, 부인했던 시나리오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 돼 가고 있다. 김정은은 핵보유국을 선언하고, 트럼프는 “내가 미 본토를 지켜냈다”고 선언할 것이다.

과연 이 시점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완전한 비핵화 로드맵 없는 북·미 합의에도 그저 “완전한 비핵화 협상으로 가는 중간단계!”라 환영할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될 일인가. 3~4월의 김정은 서울 답방을 위해선 어쩔 순 없는 것인가. 문제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당분간 ‘마지막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의 목적을 달성한 트럼프가 자신의 재선이 걸린 선거전이 시작되는 올 하반기 이후에도 한국을 위해 ‘완전한 비핵화’ 협상에 매달려 줄 리가 없다. 그리 믿는다면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것이다. 주한미군 감축, 철수 이야기가 안 나오면 다행이다. 하지만 사실 별로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이 상황을 재촉하고 자초했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협상의 달인’은 트럼프도 문재인도 아닌 김정은 같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