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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발명’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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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가 뉴욕에 갔을 때의 일이다. 택시 기사가 그에게 당신 나라의 ‘적’은 누구냐고 물었다. 에코가 돌이켜보니 이탈리아는 역사상 ‘외부’의 적이 별로 없었다. 이탈리아는 끊임없이 내부의 적들과 ‘서로’ 싸웠다. 피사와 루카가 싸웠고, 구엘프와 기벨린, 북과 남, 파시스트들과 평화주의자들, 그리고 마피아와 국가가 싸웠다. 에코가 생각하기에 ‘적’이란 인간사회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것과 겨뤄 자기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적이 없을 때, 사람들은 적을 ‘발명’해내고 그렇게 ‘창조’해낸 적을 ‘악마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론적 우위를 확인한다. 가령 극우 스킨헤드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확실시하기 위해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적이자 악으로 간주한다. 로마 황제 타키투스는 유대인들을 비난하면서 “우리에게 신성한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불경하며, 우리에게 불결한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율법이다”라고 하였다. 에코는 이런 현상들을 “적 발명하기”라고 부른다.

차이가 적인 사회에 ‘출구’는 더디 오거나 없고 #있지도 않은 적을 생산할 때 세계는 지옥이 된다

문제는 실제의 적이 아니라 ‘발명’된 적이다. 발명된 적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단지 ‘차이’의 존재들일 뿐이다. 차이가 용납되지 않을 때 적이 창조된다. 타자를 악마화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는 주체들은 대부분 빈약한 정체성의 소유자들인 경우가 많다. 몰락하는 이념의 소유자들일수록 새로운 가치를 적대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낡은 세계의 마지막 짐꾼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희석화되면 될수록 더욱 과격한 방식으로 적을 생산한다. 오로지 적들의 존재 속에서만 자신들의 존재성이 부각되므로, 그들은 더욱 선명한 적을 만들어내며 그들과의 극단적인 대립각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있어서 ‘사소한’ 차이는 늘 ‘근본적인’ 문제로 인식되며, 그것의 사소함이 밝혀질 때 자신들의 존재성 역시 사소해지므로 그들은 허기진 맹수처럼 다른 차이를 찾아 나선다. 이것이 적을 발명하는 주체들의 생존 방식이다.

이런 식의 적 만들기는 사실상 일상사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차이의 타자들을 견디지 못하고 적들을 만들어내며 배제한다. 적 발명하기가 공공 영역에서 발생할 때 문제는 더 커진다. 공공 행위는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므로 그 규모와 여파가 방대하다.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다른 집단을 적으로 만들 때 국가 단위의 엄청난 에너지가 소진된다.

특히 정치가 정당성 논쟁이 아니라 적 만들기 싸움으로 흘러갈 때 생기는 모든 문제는 고스란히 국가 구성원 전체의 몫으로 돌아간다. 한국 사회를 오래 지배해온 적성(敵性)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왔다. 수많은 정권들이 이념을 내밀며 정체성을 세웠고 타자들을 적화(敵化)해왔으며, 지금도 이런 방식의 싸움은 색깔론의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세기는 바뀌었고, 이념을 버린 세계는 전 지구적 자본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다. 차이가 적이며, 타자가 환멸의 존재인 사회에 ‘출구’는 더디 오거나 없다. 정치가 할 일은 차이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적의 본질을 타자에게 부여하고 적을 생산할 때, 세계는 지옥이 된다.

에코는 “적 발명하기”라는 글의 마지막을 사르트르의 단막극 『출구 없는 방』에 대한 언급으로 끝낸다. 이 작품에는 창문도 거울도 없이 밀폐된 방에 갇힌 세 명의 죽은 자들이 등장한다. 이 방 안에는 고문하는 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끊임없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들은 거울 대신에 타자의 얼굴을 보며 서로를 증오한다. 한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모두는 다른 두 사람을 고문하는 자로 행동할 거야.” 타자의 ‘존재’ 그 자체가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지옥이었던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