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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문자엔 '커터칼' 없었다…신고자 위험에 빠뜨린 '45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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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신고자 A씨가 지난 19일 112에 보낸 문자신고. 112 문자신고 시스템의 45자 글자 수 제한으로 인해 흉기 관련 내용은 경찰에 접수되지 않았다. [연합뉴스]

신고자 A씨가 지난 19일 112에 보낸 문자신고. 112 문자신고 시스템의 45자 글자 수 제한으로 인해 흉기 관련 내용은 경찰에 접수되지 않았다. [연합뉴스]

버스 안에 흉기를 든 남성이 있다는 112 문자신고를 승객이 했음에도 출동한 경찰이 신고자만 찾다가 그냥 돌아갔는데, 그 이유가 45까지만 접수가 가능한 문자신고의 한계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경찰은 뒤늦게 112 문자신고 접수 용량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버스 커터칼 난동에 몰래 신고 #글자 수 제한에 흉기 부분 끊겨 #출동한 경찰 “신고자 누구냐” #신고자 “보복 당할까 두려웠다”

21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 19일 오후 10시30분쯤 서울 영등포구 당산역 앞을 지나던 마을버스 안에서 한 남성이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 수차례 허공에 휘둘렀다. 이 남성은 다른 승객들을 향해 “가까이 오지 마라”며 욕설을 하기도 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A씨는 이 모습을 보고 “파란 패딩을 입은 남자가 욕설하며 커터칼을 들고 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 112에 신고했다.

음성신고와 마찬가지로 문자로 신고내용을 적어서 112 번호로 전송하면 경찰에 신고가 가능하다. 위치·내용·상황 등을 적어 보내면 관할 지역에 상황이 접수된다. 신고 문자에는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사진과 동영상 첨부도 가능하다. 특히 버스 안에서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는 상황 등 안전상 신고자가 음성 통화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빠르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A씨는 문자 신고를 하고 경찰 출동을 기다렸지만 현장에 온 경찰관들의 대응은 A씨를 당황케 했다.

A씨는 “다음 정류장에서 경찰관들이 버스에 올라 ‘신고자 계십니까?’라고 큰소리로 외쳤다”며 “해당 남성이 자리를 이동해 옆자리에 앉아 대답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신고자를 찾지 못한 경찰이 버스에서 내리자 A씨는 곧바로 뒤따라 내려 자신이 신고자임을 밝히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제야 경찰은 해당 남성을 버스에서 내리게 했다.

그러나 간단히 신원 확인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A씨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공간에 있는 상황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공개적으로 신고자부터 찾아 두려움을 느꼈다”고 경찰의 허술한 대응을 지적했다.

신고를 받아 출동한 당산지구대 관계자는 “당시 접수된 문자는 뒤에 내용이 툭 끊겨서 우리에게 온건 ‘파란 패딩을 입은 남자가 욕’이라는 것뿐이었다”며 “흉기를 들고 있다는 건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만약 알았다면 현장에서 달리 대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영등포경찰서 112상황실장은 “문자 신고 시스템의 오류로 현장을 출동한 경찰관들이 배경을 모르고 갈 수밖에 없었다”며 “시스템 자체는 전국 공통인 것으로 어떤 오류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확인 중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스템상의 오류가 아니었다. 확인 결과 112문자 신고 시스템은 45자 이내로 글자 수 제한이 있었다.

A씨가 신고한 문자에서 ‘욕’이라는 글자까지가 45자로 이하 흉기에 관련한 내용은 접수 자체가 되지 않았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문자가 끝까지 안 들어오니까 전산 기술적인 내용을 모르는 실무자 입장에선 오류였던 것처럼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긴박한 신고 문자는 40자 이상 길게 들어오진 않는 게 대부분인데 이번 건 좀 길었다”며 “앞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원 청장은 “신고자의 보안을 유지하고 비밀을 지켜줘야 하는데, 세심하게 챙기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사과하고 “신고자의 비밀이 보장될 수 있도록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21일 LG유플러스를 통해 긴급 보완조치를 시행, 이날 오후 7시부터 신고 문자 메시지 글자 제한이 45자에서 70자로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영등포경찰서는 추가로 피해 진술이 확보되면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할 계획이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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