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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장생불사의 약 제주 여기서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흔히 한국의 제주도와 중국을 묶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사드사태 이전 물밀듯이 들어왔던 중국인 관광객들을 떠올릴 것이다. 비교적 먼 과거를 보더라도 고려 때 대몽항쟁을 벌였던 ‘제주 삼별초’ 정도다. 그런데 생각보다 제주도와 중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다. 바로 제주도 남부에 위치한 도시 ‘서귀포’ 지명의 유래와 관련해서다.

서귀포 ⓒ셔터스톡

서귀포 ⓒ셔터스톡

서귀포가 서귀포인 이유를 밝히자면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 550여년의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끝낸 진왕 영정은 이전의 통치자와 역사에 전무한 일을 해낸 자신을, 이전의 시대와 자신의 시대를 구분하고자 했다. 그리고는 이전 시대의 최고 통치자를 이르는 말인 ‘왕’과 구별되며, 하늘 아래 자신과 병존하는 권력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절대 권력자라는 의미를 내포한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고안해낸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진시황이라 부르는데 ‘시황제(始皇帝)’란 바로 최초의 황제라는 의미다.

중국 최초 통일국가 진(秦) 제국과 얽힌 전설 #서귀포 지명 유래, 한중일 우호교류의 상징으로

황제가 된 후 그가 즉각 시행한 제도 중 하나는 바로 군현제(郡縣制)를 확대한 것이다. 진시황은 통일 이전부터 자신이 정복한 영토에 군과 현을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중앙집권체제 구축을 시도하고 있었다. 진 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를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군 밑에는 현을 두어 군과 현에 본격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했다. 개국 공신이나 친족을 왕으로 책봉하여 땅을 나누어 통치하고 세습하게 했던 주나라의 봉건제와 확연히 다른 통치 시스템인 것이다. 진시황은 전 중국의 영토와 백성을 관료라는 수단으로 직접 지배하는, 강력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병마용 ⓒ셔터스톡

병마용 ⓒ셔터스톡

중국의 모든 지역에 자신의 권력을 뿌리내리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지방관 파견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을 직접 돌아다녔는데, 이것을 순수(巡狩)라고 한다. 순수를 통해 군현을 시찰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단 문자, 도량형, 화폐, 도로의 폭, 수레의 폭과 바퀴의 크기 등을 통일한 것도 제국을 일원적으로 통치하고자 한 조치 중 하나였다.

몸은 하나인데 사분오열 되어있던 나라들을 통일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폭군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진 제국 통일 이전에도 하루에 죽간으로 된 공문서를 120근씩(당시 도량형의 1근은 현재의 약 250g인데 죽간 하나의 무게가 최대 1kg이라고 한다면 하루에 최소 30건의 정무를 검토하고 처리한 것으로 추측된다)읽느라 잘 먹지도 쉬지도 못했던, 성실한 통치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애써 통일한 제국의 절대 권력자로서 영원한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오래 살면서 영화를 누리고 싶었을 인간적인 바람도 컸을 것이다.

이러한 장생불사의 욕망을 채워 줄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통일왕조를 성립한 2년 후인 기원전 219년, 진시황은 순수길에 올랐다. 동쪽의 군현을 시찰하고 진 제국의 정통성을 하늘과 땅에 알리는 봉선 의식을 거행하고자 함이었다. 그가 랑야(琅琊), 지금의 산둥성 칭다오시 황다오 연안에 머물렀을 때 서복(徐福, 서불 徐市 이라고도 함)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진시황에게 청을 올린다.

“바다 가운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라 불리는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그곳에 신선이 살고 있으니,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불로장생약을 구하러 가게 해 주십시오.”

당시 중국에서는 신선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신선사상은 전국시대 말기에 생긴 것으로, 불로장생하는 신선의 존재를 믿고 그 경지를 추구하는 사상을 말한다. 중국에서 신선사상이 제일 먼저 나타난 곳은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제나라였다. 또한 사마천이 쓴 사기 봉선서에는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 연나라의 소왕이 신선과 불로장생약이 있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을 찾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서복은 바로 이 신선사상의 발상지, 제나라 출신의 방사였다. 방사(方士)란 천문, 의학, 신선술, 점복 등을 연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서복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삼천여 명, 3년 동안 먹을 곡식과 의복, 약품 등을 실은 대규모의 선단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떠났다.

 제주도에 내리는 서복 일행 ⓒ차이나랩

제주도에 내리는 서복 일행 ⓒ차이나랩

그가 불로장생약이 있다고 여긴 세 장소 중 하나인, ‘영주’는 바로 제주도의 옛 지명이다. 영주에 다다른 서복은 지금의 한라산에서 자신이 불로초라 여긴 영지버섯, 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을 구했다. 그리고는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서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서귀포(西歸浦)는 이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서복이 돌아간 포구’라서 서귀포였다가, 훗날엔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해서 서귀포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제주도에도 ‘한라산은 신선이 놀던 산으로 신선들이 흰 사슴을 타고 다녔고 영주초를 흰 사슴에게 먹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한라산이 아무리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산이라 해도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약초가 있었을 리가 만무하다. 제주도에 머물 때였건 가는 도중에였건 그가 한라산에서 구해온 것들이 불로초가 아니라는 사실은 서복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서쪽으로 돌아간다. 그 이유는 당시 진시황이 불로장생약을 얻기 위해 서복 이외에도 많은 방사들을 바다로 보냈고, 전국을 돌며 공무를 처리하기 바쁜 황제가 자신의 존재쯤은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폭포에 새긴 서불과지 ⓒ서복전시관 홈페이지

폭포에 새긴 서불과지 ⓒ서복전시관 홈페이지

그런데 문제는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다시 랑야 순수에 나섰다는 점이다. 진시황이 내릴 벌이 두려웠던 서복은 진시황을 찾아가 거짓을 고했다.

봉래산의 불로장생약은 구할 수 있으나 바다 속에 큰 교어(鮫魚 용 같은 물고기)가 방해하여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복은 진시황에게 활을 잘 쏘는 궁수들을 파견해 교어들을 퇴치할 것을 건의했다. 기원전 210년은 진시황이 사망한 해인데, 그 때쯤 진시황의 불로초에 대한 그의 열망은 거의 광기에 다다랐을 가능성이 높다. 최강의 궁수부대를 자랑했던 진나라의 황제에게 바다 물고기 쯤이야. 진시황은 이전과 같은 규모의 선단에 궁수들까지 딸려 다시한번 불로초를 구해오게 했다. 서복은 불로초의 존재에 대한 반신반의와, 이번에도 불로장생약을 구하지 못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불안 속에서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복은 ‘평탄하고 너른 땅(平原廣澤)’에 도달하자 그곳에 정착하여 돌아가지 않았다.

 서복은 한중일 우호교류의 상징이자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로 기록된다.

서복이 정착한 그 땅은 바로 지금의 일본이다. 서복의 무리는 새로운 땅에 농업과 어업, 의약, 주거문화, 토기 등을 전수했다. 기원전 2세기의 일본은 부족 사회에서 막 국가 형성을 앞둔 과도기적 시기였다. 서복 무리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물을 대어서 벼농사를 짓는 수도작이  시작됐다. 이 시기에 형성된 농경 문화를 이전 시기와 구분하여 ‘야요이 문화’라고 부른다.

서복전시관의 서복 상, 원자바오 총리의 친필 휘호 비석 ⓒ차이나랩

서복전시관의 서복 상, 원자바오 총리의 친필 휘호 비석 ⓒ차이나랩

벼 농사 이외에도 야요이 문화는 청동기와 철기 같은 금속기의 사용과 제작이 시작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농경 기술을 전파하고, 일본을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이끈 서복은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낸 ‘문화의 사자’로 평가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서복은 중국과의 오랜 인연을 나타내는 인물이 됐다. 1999년에는 서복문화재교류협회가 창립되어 2002년부터 매년 한중일 국제학술 토론대회 및 문화제를 개최하여 서복문화 교류에 힘쓰고 있다. 또한 2003년 9월 23일에는 서복과지가 쓰인 서귀포시 정방폭포 인근에 서복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서복전시관에는 서복 동상과 서복의 이야기,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 등이 전시돼있다.

2007년에는 한중수교 15주년을 기념하여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중국 관련 우호단체장을 접견한 적이 있었다. 한중친선협회 이세기 회장은 당시 ‘서복공원’을 기념한 휘호를 원 총리에게 부탁했다. 이에 원 총리는 당시 주한중국대사였던 닝푸쿠이 대사를 통해 휘호를 전달했으며 산둥성 정부에서는 이 휘호를 돌에 새겨 제주도에 기증했다.  서복 기념관 앞에서 볼 수 있는 서복공원 휘호 비석은 한국과 중국의 꾸준한 우호의 상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차이나랩 조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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