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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바텐더로 변신한 김택진 대표…수직 대신 수평 택한 판교밸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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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는 대한민국의 새 성장동력이다. 공장 굴뚝 하나 없는 이곳에 1200여 개 기업, 7만여 명의 인재들이 한국판 구글ㆍ페이스북을 꿈꾸며 일한다. 중앙일보는 2019년 한해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디지털 시리즈를 통해 판교 테크노밸리 기업과 사람들의 꿈ㆍ희망ㆍ생활을 해부한다.  

사내 개발자 컨퍼런스인 NCDP에서 일일주점 바텐더로 변신한 김택진(사진 가운데) 엔씨소프트 대표. 일일주점의 이름은 '뭐든 물어BAR'다. 사진 엔씨소프트

사내 개발자 컨퍼런스인 NCDP에서 일일주점 바텐더로 변신한 김택진(사진 가운데) 엔씨소프트 대표. 일일주점의 이름은 '뭐든 물어BAR'다. 사진 엔씨소프트

사내 일일 주점인 '뭐든 물어bar'에서 바텐더로 변신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바텐더 답게 앞치마까지 둘렀다. 사진 엔씨소프트

사내 일일 주점인 '뭐든 물어bar'에서 바텐더로 변신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바텐더 답게 앞치마까지 둘렀다. 사진 엔씨소프트

지난해 11월 게임업체인 엔씨소프트 판교 사옥에는 간이 술집이 생겼다. 술집 이름은 ‘뭐든 물어 bar’. 바텐더는 김택진(52) 엔씨소프트 대표였다. 일일 바텐더였던 김 대표는 직원들에게 수제맥주 등을 따라주면서 평소 사무실에서 말하기 힘들었던 고충들을 상담해줬다. 개발자로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가감없이 전달한 것은 물론이다.
‘뭐든 물어bar’는 엔씨소프트의 사내 개발자 콘퍼런스인 ‘NCDP(NC Developers Party) 2018’ 행사의 일부였다. 이틀 동안 열린 NCDP에서 김 대표는 직원들과 격의 없이 생각을 나눴고, 조언을 건넸다. 직원들의 셀카 촬영 요청에도 흔쾌히 응했다. 직원들은 “고용주가 아니라 개발자 선배이자 형ㆍ오빠 같았다”며 반겼다.

김 대표의 수평적 소통 행보는 이 뿐이 아니다. 그는 매 분기마다 열리는 ‘I&M(Innovation & Management) 리포트’ 행사에서 사내 방송의 진행자로 변신한다. I&M은 엔씨소프트의 살림살이와 주요 현안 등을 설명하는 자리. 2014년 5월 시작된 이 행사는 초기엔 실장급 이상 직책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해 오다가 2016년 10월부터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확대했다. ‘직원들 모두에게 회사에 대한 팩트를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김 대표의 생각에 따른 것이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이 행사의 가장 큰 특징은 익명 채팅으로 실시간 질문을 던질 수 있단 점이다. 설명을 듣다가 궁금한 점이나 건의 사항이 생기면 바로바로 김 대표에게 물을 수 있다. 김 대표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질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히 구두로 답한다. 익명인 만큼 질문 내용엔 제한이 없다. 2017년엔 한 직원의 익명 건의로 전 직원들에게 닌텐도 게임기와 게임팩 등을 선물한 적도 있다. 당시 닌텐도 게임기 구입 등에 15억원 가량이 들었다.

직원들 편하라고 CEO 사무실 이사

판교밸리 기업들이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수평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활발하게 나올 것이란 믿음에서다. 대기업들도 위계 질서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지만 판교밸리 기업에 이를 만큼은 아니다.

한성숙(52) 네이버 대표는 2017년 3월 취임 직후 집무실 위치를 바꿨다. 맨 꼭대기 바로 아래층인 26층에 있던 사장실을 15층으로 옮겼다. 27층 짜리 본사 건물에서 저층부 엘리베이터(8대)와 고층부 엘리베이터(6대)가 모두 운행하는 곳은 15ㆍ16층 뿐이다. 고층부에 있는 직원이든 저층부에 있는 직원이든 더 편하게 자신에게 올 수 있도록 한 조치다. 과거엔 저층부에 있는 직원이 대표를 만나려면 15ㆍ16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했다.

한성숙 네이버 대표가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네이버

한성숙 네이버 대표가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네이버

한 대표는 또 취임 이후 수시로 직원들과 직접 만난다. 회의 자리에 젊은 직원이 참석하는 경우도 잦다. 직급이 아니라 회의 주제에 맞춰 참석자를 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기업에서 당연시 하는 의전 관련 업무도 확 줄였다. 외부 행사에서 스피치를 해야 할 때는 자신이 직접 원고를 작성한다. 대부분의 기업엔 스피치 라이팅을 전담하는 직원이 따로 있다. 수행 비서는 아예 없다. 세 명으로 구성된 사장 지원팀은 비서나 의전 업무보다는 자료 조사와 다른 직원과의 회의 일정 잡기 등을 주요 업무로 한다. 한 대표는 또 오전 9시면 출근하지만 지원팀 직원들은 각자의 스케쥴에 맞춰 자유로이 출근한다. 대표보다 먼저 나오는 것을 당연스레 생각하는 대기업과는 다른 모습이다.

CEO 성적을 직원들이 평가

창업자이자 CEO의 근무성적을 직원들이 평가하는 회사도 있다. 인테리어 플랫폼 앱인 ‘오늘의 집’을 운영하는 ‘버킷플레이스’가 그렇다. 버킷플레이스의 이승재(32) 대표는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6명의 직원들로부터 고과평가를 받았다. 평가 항목은 ‘고객에 대한 집착’과 ‘자율과 책임’ 등 회사 핵심가치에 얼마나 부합했는지를 토대로 잘한 점과 개선해야 할 점 등을 직원들이 느낀 대로 쓰는 것이었다.

 인테리어 플랫폼 앱인 '오늘의 집'을 운영하는 버킷플레이스 직원들이 회사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제일 앞줄 왼쪽 셋째가 이승재 대표다. 사진 버킷플레이스

인테리어 플랫폼 앱인 '오늘의 집'을 운영하는 버킷플레이스 직원들이 회사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제일 앞줄 왼쪽 셋째가 이승재 대표다. 사진 버킷플레이스

이 대표의 평가자는 그와 업무 관련성이 높은 직원들로 구성됐다. 다른 직원들의 평가자도 동일한 방식으로 짜인다. 평가는 최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서술형 기술로 받았다. 이 대표는 평가 결과만 통지 받을 뿐 누가 자신을 평가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 대표는 이후 평가에 대한 동료들의 피드백을 받았다. 김윤선 버킷플레이스 브랜드 매니저는 “직원들이 CEO와 관련해 평소 느끼는 아쉬운 점들을 지적하고 편안하게 개선을 요구하는 계기가 돼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직급 파괴’를 구현하는 기업도 다수다. 카카오는 직급 대신 영어 이름으로 부르기를 시행 중이다. 엔씨소프트는 2017년부터 서로를 직급 대신 ‘○○님’이라고 부른다. 김택진 대표 본인이 “이제부터 저를 택진님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얘기한 건 사내에서 유명한 일화다. 김정주(52) 넥슨 대표는 수 년전 회사에 들어오다 경비 직원에게 붙들린 적도 있다. 소탈한 차림으로 다니다보니 경비 직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다. 그는 경비 직원이 누구냐고 묻자 "저 넥슨 직원입니다"라고 답하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고 한다.

 판교밸리 기업들의 수평적 조직문화 만들기 노력에 대해선 긍정적인 반응이 다수다. 정광호 서울대 교수(개방형혁신학회 부회장)는 “수평적 조직 문화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ㆍ수용성ㆍ관용성을 높여준다”며 “한국처럼 위계질서가 강한 문화에선 수평적인 조직문화에 기반한 창의성이 발현되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그런 점에서 판교밸리 기업들의 노력은 긍정적”이라고 평했다. 이수기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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