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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의 심스틸러] 알함브라 궁전서 진짜 레벨업한 사람은

중앙일보

입력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비서 서정훈 역할을 맡은 민진웅. 게임에서도 현빈과 동맹을 맺었다.[사진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비서 서정훈 역할을 맡은 민진웅. 게임에서도 현빈과 동맹을 맺었다.[사진 tvN]

tvN 주말극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여러모로 이상한 드라마다. 스마트렌즈를 끼면 실제 지형지물을 활용한 증강현실(AR) 게임으로 변하는 낯선 설정은 차치하더라도 흔히 보던 로맨틱 코미디와도 또 다르다. 분명 시놉시스 상에는 ‘투자회사 대표인 남자주인공’ 유진우와 ‘전직 기타리스트였던 여주인공’ 정희주의 이야기라고 쓰여 있지만, 현빈과 박신혜의 연애담보다 현빈과 조력자들의 모험담이 더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특히 비서 서정훈 역할을 맡은 민진웅(33)과의 브로맨스는 너무 절절해 눈물 없이 보기 힘들 정도다.

현빈 위기 처하면 나타나는 서 비서 민진웅 #처음부터 끝까지 믿어준 ‘시티헌터’로 열연 #영화 ‘말모이’에선 깊고 진중한 연기 선보여 #희극과 비극 다 되는 배우로 거듭날까 기대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가슴을 후벼 파는 이유는 분명하다. 극 중 배경이 되는 제이원홀딩스에서 유진우 대표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박 이사(이승준 분)ㆍ최 팀장(조현철 분)ㆍ서 비서 중 유 대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은 사람은 서 비서가 유일하다. 회사의 공동창업자이자 친구였던 차형석(박훈 분)이 죽은 뒤에도 계속 게임 속에 나타난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모두 “유 대표가 미쳤다”고 했지만 서 비서만큼은 게임 속으로 들어가 그와 동맹을 맺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끝까지 곁을 지켰다. 우정 혹은 의리만으로는 하기 힘든 과업이다.

캐릭터만 놓고 보면 게임과 현실, 혹은 그 경계 어딘가를 오가는 바쁜 대표를 보좌하는 극한직업이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그간 갈고 닦아온 매력을 발산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역할이다. 사고 후 병상에 누워있는 유 대표를 보살피며 눈물을 훔치는 여친 같은 부드러움과 유 대표가 위기에 처할 때면 짠 하고 나타나 적들을 물리치곤 휙 하고 사라지는 강인함을 겸비했다고 할까. 어디 그뿐이랴. 똑똑한 유 대표도 모르는 기타 연주곡 제목도 척척 맞추고, 관계 맺기에 서툰 유 대표 대신 희주까지 챙기는 살뜰함을 자랑한다.

극 중에서 이미 죽음을 맞은 ‘시티헌터’ 서 비서가 등장할 때마다 아련함을 자아내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연기 변신이다. 그간 민진웅은 영화 ‘패션왕’(2014)에서 코믹한 두치 역할로 데뷔해 얼굴만 봐도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혼술남녀’(2016)로 성공리에 브라운관에 안착했지만 매회 수업보다 성대모사를 더 열심히 준비하는 민 교수 역할이었기에 웃음이 먼저 터지기는 매한가지였다. 스물여덟에 늦깎이 데뷔를 한 그로서는 조바심이 나기도 했을 터다.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영화 ‘내부자들’의 이병헌 성대모사 연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tvN]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영화 ‘내부자들’의 이병헌 성대모사 연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tvN]

이는 최근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고 있는 작품명만 봐도 느껴진다. 영화 ‘동주’(2016)를 시작으로 ‘재심’ ‘박열’(2017) 등 하나같이 “나도 제법 진중한 사람일세”라고 말하는 듯한 작품들이다. 지난 9일 개봉해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 ‘말모이’에서 맡은 민우철 역시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조선어학회 회원 중 가장 젊지만 가장 진지한 인물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아내 걱정에 속이 타들어 가는 탓이다. 역할의 무게감에 짓눌려서인지 그는 본래 가진 장기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우리말사전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하는 조선어학회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말모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말사전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하는 조선어학회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말모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렇다면 이제는 좀 더 과감한 선택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혼술남녀’에서 호흡을 맞춘 김원해나 ‘말모이’에서 함께 한 유해진처럼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배어나는 얼굴을 지녔으니 어느 한쪽에 맞추기 위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된단 얘기다. 웃으면 되레 슬퍼 보이고, 울면서도 환희를 표현할 줄 아는 선배들을 벤치마킹해 더욱 다양한 감정을 품을 수 있다면 여태껏 보지 못한 민진웅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두치ㆍ민 교수ㆍ서 비서보다 그의 이름이 점점 더 친숙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고3 때 다닌 연기학원에서 처음 연기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1학기에 일찌감치 단국대 법학과에 합격해 2학기 내내 노느니 학원이라도 가보라는 어머니의 추천에 취미가 됐고, 적성에 맞지 않게 버거운 공부에 6주 만에 학교를 그만둔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들어갔다는 게 그의 스토리다. 하지만 어디서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이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게 되지 않았을까. 소속사 관계자가 졸업 연극에서 그를 발견한 것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제 몫을 톡톡히 해냈던 것처럼 말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끝나도, 그의 레벨 업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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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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