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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 건축] 여성이 말하는 건축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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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호 31면

조재원 건축가·공일스튜디오 대표

조재원 건축가·공일스튜디오 대표

작년에 출판된 『우리는 여성, 건축가입니다』(원제: 『where are the woman architects?』 Despina Stratigakos 지음)의 추천사를 쓴 이후로 제목이 화두처럼 머리에 남아있었다. 애타는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듯, 새해가 밝자마자 『빌딩롤모델즈-여성이 말하는 건축』이 출간되었다. 건축을 공부하고 다양한 방향으로 경력을 쌓고 있는 여섯 명의 30대 여성들(김그린·김자연·이다미·이보름·정유리·주명현)이 의기투합해 만든 ‘여집합’이라는 기획집단이 펴낸 책이다.

많은 분야에서 자신의 일에 대한 지속적 성장을 꿈꾸는 여성들이 ‘롤모델’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업역으로 여겨왔던 건축이 예외일 리는 없다. 같은 아쉬움을 공유했던 여집합은 ‘롤모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신 ‘짓기로’ 했다. 이들은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촘촘하게 구성하고 건축의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들을 패널로 초대해 답을 듣는 2일간의 포럼을 열었다. 질문은 독립할 것인지, 조직에서 성장할 것인지의 선택부터 정년 이후의 삶까지 폭넓게 펼쳐졌다. 답하는 이들의 스펙트럼도 소규모 아틀리에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가, 대형설계사의 대표와 임원, 소셜벤처 대표, 협동조합형태의 디자이너그룹, 건축전시기획자, 출판 에디터, 교수, 사진가까지 다양했다. 필자도 ‘건축가의 정년과 건축 이후의 삶’ 대담에 참여했다. 작년 6월의 일이다. 책은 포럼과 인터뷰를 통해 일과 삶으로서의 건축에 대해 여섯 명의 여성이 묻고 스물네 명의 여성들이 답한 기록이다.

“건축의 서사에서 여성의 모습을 예외적이고 한정된 것이 아닌, 긴 생애에 걸친 당연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발견하고 공유하려 한다. 이는 여성 건축 서사의 확장, 나아가 한국 건축 서사의 켜를 두텁게 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기획자들이 밝힌 취지에 공감하여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참가자가 자신 앞에 붙는 ‘여성’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음을 피력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해 빌딩롤모델즈 포럼이 책으로 나왔다. [사진 여집합]

지난해 빌딩롤모델즈 포럼이 책으로 나왔다. [사진 여집합]

“남성들한테는 남성이기 때문에 일반화시키는 프레임을 적용하는 경우가 없어요. 그냥 그 사람 자체를 하나의 캐릭터로 보거든요. 하지만 여성이라는 큰 프레임으로 저를 규정하고 나서 개인적인 퍼스낼러티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 문화에서 빨리 탈피했으면…·” -김정임(서로아키텍츠)

“‘여성건축가’로 불리거나 성별에 따른 포션(portion)의 수혜를 원하지 않고, 그냥 건축가 정현아로 저의 작업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정현아(디아건축)

결과적으로 이런 우려를 불식한 것은 ‘여성이 말하는 건축’에 자신의 이야기를 보탠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에 임하는 태도와 생각, 또는 건축을 통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론의 고유함이 ‘여성’이라는 수사로 간단하게 일반화될 수 없음을 이 책이 역설하기 때문이다. 건축계의 ‘여성’의 존재 혹은 부재를 화제로 혹은 문제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성이 말하는(혹은 하는) ‘건축’에 방점을 찍으면서 이 책은 우리 인식의 의미심장한 문턱을 넘는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혹시 한눈을 감은 채로 우리를 둘러싼 건축을, 도시를, 그 속의 삶을 봐왔던 것은 아닐까. 텀블벅을 통해 책의 출판을 후원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감았던 한눈을 떠야만 보이는 새로운 영토의 발견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비로소 필자는 머리에 남았던 ‘여성건축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벗어났다. 지난해 6월의 빌딩롤모델즈 포럼에서 내 이야기이자 곧 우리 이야기, 일이자 곧 삶이 된 건축 이야기를 한판의 수다처럼 털어놓던 동료들과의 정서적인 어깨동무를 기억한다. 그리고 대담장을 가득 메웠던 호기심과 열정이 깃든 눈빛들을 기억한다. 이제 그들의 고유한 이야기와 성취에 대해 묻고 이야기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재원 건축가·공일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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