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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잘 지내라는 그녀의 편지, 기분이 묘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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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17화

무엇이든 가장 처음 만든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하는 이들이 주위에 꽤 있지만 진짜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미 만들어진 것에 의미를 더하고 개선하고 발전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것도 물론 문명의 발달에 기여했지만 최초의 오리진에 비해선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시간은 누구 머리에서 처음 탄생했을까. 최초에 누가 시간을 만들고, 나누어 쓰려고 생각했을까. 시간에 단위를 부여한다는 생각만큼 혁명적인 게 있었을까. 그렇게 구분된 시간 때문에 인간이 시간의 노예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시간의 매듭이 없다면 생활이 얼마나 갑갑했을까. 짙은 안개 속을 계속 걷는 것처럼. 하루와 한 달과 일 년처럼 시간이 구획 지어지면서 인간은 시간의 관리자가 될 수 있었다. 시간의 시작과 끝이 없었으면 인간의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문명 자체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생각이 평소와는 다른 곳으로 막 번졌다. 시간의 길이가 정해진 뒤 제야의 종같이 한 해를 매듭짓는 의식도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이다. 2018년을 보내는 타종 소리를 들으면 나는 누나에게 짧은 메일을 썼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난해만큼 특별한 해는 없었어요. 그런데 앞으로는 매해가 그만큼 특별할 거라 믿어요. 나의 여신이여,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새해는 누나가 좀 더 밝아졌으면 좋겠어요. Happy New Year!!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답신이 와 있었다.
-물론 나에게도 특별했지, 천이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어. 작문 수업에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더라구. 글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아닌데. 천이가 너무 착해 내 요구를 다 받아주니까 내가 점점 더 오바한 것 같아. 무엇보다 글공부시키면서 너무 심하게 대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해. 나름 열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좋은 것만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내 안녕~~

좋은 것만 기억하고 잘 지내라고? 편지는 당분간 우리의 만남이 휴지기에 들어갈 것임을 꽤나 분명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며칠 전 둘만의 송년회 때에도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기분이 묘했다. 불안하기보다는 의외로 담담했다. 우리의 관계가 좀 더 숙성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장님 연설문은 85점쯤 될까
"지난해는 방탄소년단 덕분에 우리 회사 매출이 30% 이상 늘었습니다. 사실 이런 수치는 연초엔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죠. 예상외 이득을 보듯 기업은 언제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손실을 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기업이 안고 있는 불확실성이라는 숙명 때문이지요. 영업 전선에 리스크가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요체는 리스크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발생했을 때 얼마나 기민하게 대처하느냐는 것입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맙시다. 지난해 과외의 수입은 올해로선 그만큼 부담입니다. 베이스가 높아졌기 때문이지요. 늘 그랬듯이 일당백의 정신으로 난관을 헤쳐 나갑시다."

사장님의 시무식 연설문은 무난했다. 점수로 매기면 85점 정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의 글이나 말에 그렇게 점수를 매기는 버릇이 어느새 나도 들어있었던 것이다. 모범답안이긴 한데 너무 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좀 더 발랄하거나 파격적인 시무식은 없을까. 역발상을 하자며 사장이 물구나무를 서는 시범을 보인다든가, 멋진 시 한 수로 시무식을 대신하면 어떨까. 낯선 직원들 사이에 서서 나는 혼자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난해 매출과 이익이 늘어난 덕에 직원들은 특별보너스를 100%씩 받았다고 했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하여튼 지난해 좋은 실적 덕에 회사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괜찮은 회사에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팀장은 나에게 일단 인사팀에 배속돼 보름 정도 현장 실습을 받으라고 했다. 낯선 환경은 사람을 작게 만든다. 나는 사회 초년병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뒤 나는 중동팀에 발령받았다. 팀장은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새로운 일이었지만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제는 언어였다. 영어가 주된 소통 도구였지만 아랍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도 점점 생겨났다. 그래서 학원에 등록하고 회사 출근 전에 1시간씩 공부를 시작했다. 다 비슷하게 생긴 글자를 늘어놓고 해독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일 익히랴, 아랍어 배우랴 시간은 금세 갔다.

대학 여자 동창....
-역시 바빠지니 어쩔 수 없구나.
누나와 이렇게 안 만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시간은 빨리 가고 있었다. 이러다 지난해 만남은 그걸로 마무리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나에게 메일을 쓰고 싶었지만 나도 한번 참아보기로 했다.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 물속에 들어가 숨을 참듯 나는 그렇게 참고 있었다.

“혹시? 아 맞네. 김천!"
어느 날 책상에 머리를 박고 한참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그렇게 말을 걸었다. 대학 1학년 때 알고 지내던 여자 동창이었다.
"야, 반갑다.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네. 이렇게 같은 회사에서 근무할 줄이야."
그녀는 며칠 전 과장급 경력직원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름을 확인해 보니 나인 것 같아 찾아왔다고 했다. 그날 저녁 자연스레 식사자리가 만들어졌다.

그 친구는 졸업 후 바로 이 회사에 들어와 지금은 기획팀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회사가 아직 중소기업이긴 하지만 분위기는 좋은 편이야. 또라이도 별로 없고. 회사라는 게 실적이 좋으면 다 좋은 거잖아. 아무튼 잘 왔어. 환영해."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던 나는 큰 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세상 참 좁지. 그 많은 회사 중에서 어떻게 이 나이에 우리 회사에 온 거야?"
나는 전에 다니던 회사 사장이 이 회사 대표님과 잘 아는 사이여서 나를 소개해줬다고 했다.
"와, 그럼 사장님 빽이네. 하하"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주고받으며 꽤 이슥하도록 한잔했다. 그녀도 아직 싱글이었다. 그리 빠지는 인물은 아니었고 성격도 좋은 편인데, 자신도 왜 아직도 결혼을 못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하여튼 요즘 세상은 싱글 천지다. 돌싱까지 합치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게 새해도 어느새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2월 마지막 주말이 되니 겨울이 저만치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누나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어 안타까운 그 호소가 귓전을 때렸다.

"나 좀 여기서 꺼내줘."
나는 바로 렌터카를 빌려 용인 요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누나의 아버지는 더욱 야윈 것 같았다. 여전히 주무시고 있었다. 그게 약 때문인지 병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침대 옆에 서 있는데 아버지가 퀭한 눈을 떴다.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아버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지난해 가을 누나와 같이 와서 인사드렸던 김천입니다."
"전에 왔던 그 총각 맞지?"
쇠락한 육체에 비해 정신은 아직도 그리 혼미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육신에 비해 영혼이 강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왜 사람이 죽은 후에도 혼은 이승을 한참 더 머문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보람이가 얼마 전 다녀갔는데……. 이번엔 왜 따로 왔어?"
누나는 자기 이름이 무명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보람이었다.
"아, 네. 서로 시간이 안 맞아서요."
나는 안부가 궁금해서 그냥 한번 들렀다고 했다.
"요즘은 좀 어떠세요?"
"나 좀 여기서 꺼내줘."
아버지는 똑같은 호소를 했다.
"저 여자들이 나에게 수면제만 먹이고 있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어."
아버지는 누나에게도 같은 호소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나는 저번에 이미 별일 아닌 듯 반응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나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가둬두고 있는 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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