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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우린 나랏돈 퍼주는 영업사원”…진실 밝힌 분노의 e메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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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현직 일자리 지원 심사원입니다. 일자리 안정자금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진실한 제보 드리겠습니다.”

“일자리 안정자금 실상 알리겠다” #심사원도 공무원도 취재 도와 #고용부는 실상과 다른 해명뿐 #정부, 국민 분노에 귀 기울어야

지난해 12월 초, 한 통의 e메일이 수신함에 도착했다. 수십 차례의 전화·문자를 나눈 끝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타난 제보자는 “안정자금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의기투합한 심사원들이 그를 돕는다고 했다. 이후 여러 명의 심사원을 만나고 통화했다. 밖에서는 모르는, 아니 몰라야 하는 ‘진실(내부 문건)’과 ‘정황(심사원들의 단톡방)’이 쌓여갔다. 행여나 제보한 게 들킬까 걱정하던 취업준비생, 한 움큼의 자료를 갖고 먼 길을 달려 기자를 찾아온 ‘경력단절녀’, 나랏돈을 이렇게 써도 되는지 단톡방에서 분개했던 수많은 심사원. 몇 명의 현직 공무원과 국회 관계자들도 취재팀을 도왔다.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최저임금을 받는 근로자를 보조하기 위해 만든 일자리 안정자금의 집행을 위해 최저임금을 받는 계약직을 채용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일한 심사원들. 그들은 스스로 “영업사원 같았다”고 했다. 늘 실적(집행률) 압박에 시달렸고 운용 지침은 한 달이 멀다고 바뀌었다고 했다. 한 심사원은 “오로지 실적, 실적이었다”고 말했다.

일자리 안정자금의 실태를 폭로한 중앙일보 보도<12월 16·17일 자> 직후, 고용노동부는 설명자료를 배포했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았다. 실상과 달라서였다.

첫째, 고용부는 일자리 안정자금의 실적을 개별적으로 압박하거나 관리한 적이 없다고 했다. 지난해 1월 30일 근로복지공단 대책 논의 문건에 이런 말이 나온다. ‘고용부에 외부 신청 독려 전화 발송량을 매일 집계 및 보고해야 하는 상황.’ 11월 28일 15차 점검 회의 자료엔 ‘고용부에서 1일 단위 집행 실적을 점검하고 있는 바’라고 돼 있다. 이게 압박이 아니고 관리가 아닌가.

둘째, 고용부는 12월 집행률이 크게 증가한 이유는 생업에 바빠 미처 신청하지 못한 사업주의 신청이 하반기 많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세 사업주들이 상반기엔 생업이 바빠 못하고 하반기에는 한가해 신청했다는 말인가.

셋째, 안정자금을 신청하지 않은 사업장에 지원금을 준 게 아니라 이미 지원받고 있는 사업주를 대상으로 추가 지원한 것이다? 그러면 왜 사업주들에게 추가 지원을 하겠다고 먼저 알리지 않고 돈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안내 우편물 발송을 했나. 당시 ‘지원 제외 신청서’도 동송했다. 지원 싫으면 지원 제외 신청서를 특정일까지 제출하라고 한 것은 또 뭔가.

넷째, 고용부는 십수 차례에 걸쳐 지원 대상을 늘렸다는 지적에 대해 집행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반기 경기·고용 여건과 소득 분배 악화에 대응해 선제 대응한 것이라고 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소가 웃을 일이다.

애초 정책·예산 설계가 잘못됐다는 시인을 못하겠거나, 경기·고용 여건을 예측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기 어렵다면, 본지가 보도한 심사원들의 ‘단톡방’ 내용을 정독하기 바란다. 여기엔 이 정책을 만든 기획재정부와 덜컥 예산안에 합의한 정치권도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고용부는 간편 서식(지급희망서)만 제출하면 안정자금을 지급하는 두루누리 사업장에 대해 지난해 12월 소급 지원을 허용하면서, 두루누리와 안정자금의 지원 조건이 동일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두루누리 사업은 소급 적용을 하지 않는다.

일자리 안정자금이 ‘선한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선한 정책도 이해가 상충하고 복잡다단한 현실에서는 뒤틀리고 표변할 수 있다. 정교하게 설계하고 엄정하게 집행돼야 하는 이유다. 그런 측면에서 일자리 지원 심사원들이 왜 그토록 분노했는지 정부 당국자들은 귀 기울여 주길 바란다. 하긴 어디 일자리 안정자금뿐이랴만.

김태윤 탐사보도부문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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