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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의 직격 인터뷰

"노영민, 野·보수 몸으로 부닥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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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노무현 2기 김우식 비서실장이 문재인 2기 비서실장에게 

김우식 전 비서실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2기 청와대를 이끌었다. 지금의 노영민 비서실장과 비슷한 시점이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최정동 기자]

김우식 전 비서실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2기 청와대를 이끌었다. 지금의 노영민 비서실장과 비슷한 시점이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최정동 기자]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 가운데 ‘김우식 카드’는 가장 파격으로 꼽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2월 제2기 비서실장으로 발탁한 김우식(79) 당시 연세대 총장은 보수를 자처하는 인사였을 뿐 아니라, 선거 공신은 커녕 노 전 대통령과는 생면부지의 관계였다. 하지만 ‘진보 대통령’과 ‘보수 비서실장’은 1년 6개월간 무리 없이 호흡을 맞췄다. 노영민 비서실장을 택한 문재인 정부의 2기 청와대 출범에 맞춰 김 전 실장을 만나 청와대를 이끈 경험을 들어봤다.

노 전 대통령, 비서실장 전격 제안에 #“대선 때도 안 찍었습니다” 고사 #부인·방우영 이사장도 참여 권유 #갈등완화 위해 각계 물밑접촉 #탕평인사 불발, 갈등 사안 연속추진 #문재인 정부 성공 바라서 안타까워 #캠프-민주당 기용 때 능력 우선을 #청와대가 다하면 공무원 복지부동

어떻게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게 됐나.
“2003년 10월 말, 청와대에서 전화로 저녁 초대를 하더라. 노 대통령과는 전혀 몰랐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청와대 들어가 사모님(권양숙 여사)이랑 셋이서 식사를 하는데, 노 대통령이 ‘저한테 해주실 말씀 없습니까’라며 슬며시 얘길 꺼내더라. 그래서 ‘지금 갈등과 분쟁이 심한데, 이런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지 않고 어떻게 성공한 대통령이 되실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총장님이 좀 청와대에서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도록) 도와달라’고 하시더라. 사양했는데도 계속 권하시길래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사실 저는 (노 대통령을) 찍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껄껄 웃으시면서 ‘(대학 총장 가운데) 비단 김 총장님만 저를 안 찍었겠습니까’라고 하시더라. 사실 거기서 호감을 갖게 됐다. 너무 소탈하잖나.”
어쨌든 단호하게 거절한 셈인데.
“그렇다. 학교로 돌아와서 연세대 이사장님에게 청와대 다녀온 얘기를 했다. 이사장님이 ‘그 험한 세계에서 순둥이 총장이 배겨날 수 있겠나. 잘했다’고 하시더라. 이사장님은 저를 순둥이라 불렀다.”
당시 연세대 이사장이….
“고(故) 방우영씨다.”
실장 제안을 고사하니까 청와대 움직임이 어땠나.
“석 달 뒤인 2004년 1월 초, 청와대에서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아내하고 같이 들어오라는 거였다. 우리 집사람은 아사리판(정치권)에 가는 건 안 된다고 펄펄 뛰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식사 요청은 딱히 거절할 수 없잖나. 그래서 연세대 기념품인 커피세트를 하나 들고 들어갔다. 들어가는 걸음은 무거웠지만 노 대통령이 아주 재밌게 자리를 이끌었다. 그러다가 또 나를 딱 정면으로 쳐다보시더니 ‘총장님, 좀 결심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정말 못합니다’라고 버텼다. 그런데도 계속 설득하는데, 그 와중에 ‘저 좀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시더라. 마음이 찡했다. 막판에는 ‘제가 편치 않으시더라도, 나라를 위해서 봉사 좀 해주세요’라고 하셨다. 막판에 선물(커피세트)을 드리고 일어서는데, 청와대 관저 앞 인수문까지 배웅을 해주셨다. 그런데 손에 커피세트를 그대로 들고 계셔서, 그걸 보는 마음이 착잡했다. ‘아, 저 양반이 급하긴 급하구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사리판에 못 간다던 집사람이 ‘노 대통령 만나보니 참 진솔하다. 도와드려도 괜찮겠다’고 했다. 다음날 방 이사장을 다시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이번에는 방 이사장도 ‘김 총장, 들어가는 게 순둥이 총장의 운명인 것 같네’라고 하셨다. 그래서 혼자 기도를 하며 ‘대통령이 그렇게 원하시니 가서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나오자’고 결심했다.”

세상의 시선과는 달리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방 전 이사장이 김 전 실장의 노무현 정부 입성에 찬성했다는 대목이 의외였다. 김 전 실장은 진영을 초월하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어 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라 했다.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은 없었나.
“2004년 2월 14일 임명장을 받기 전 대통령과 단둘이 차를 마시면서 두 가지만 부탁하겠다고 했다. 첫째는 ‘그만둘 때 제 발로 걸어나가겠습니다. 더 있을 필요가 없을 때 나가겠다고 말씀드릴 테니, 그 후 두 달이 지나면 사표 수리를 해주십시오’라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이 ‘왜 들어오지도 않고 나가는 것부터 말씀하십니까’라고 하더라.(웃음) 저로선 ‘연세대 총장이 불그죽죽한 곳에 왜 들어가냐’고 온갖 욕을 다 먹은 뒤였다. 여느 장관들처럼 전화 한마디로 찍 잘릴 순 없잖나. 두 번째는 ‘제가 (보수의) 재향군인회, 성우회, 기독교 대표자회, 거침없이 만나고 다닐 텐데 혹시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라도 (정보기관 등을 통해) 알아보려고 하지 마시고 저한테 직접(진위를) 물어주세요’라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웃으시면서 ‘다 들어 드리겠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이 당부한 것은 없었나.
“‘정치는 내가 할 테니까 조직과 인사관리 책임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언제나 정치엔 자신이 있었다. 흔히 대통령 비서실장을 ‘정무형’과 ‘관리형’등으로 나누는데, 노 전 대통령은 후자를 역할로 설정한 셈이다.

일종의 ‘관리형 실장’이었나보다.
“그런데, 막상 일하다 보니 뭐가 정치고, 뭐가 관리인지 모르겠더라. 일단 국회를 눈에 띄지 않게 여러 차례 가야 했다. 노 대통령이 어느 날 부르시길래 갔더니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해야 되는데, 부처별로 의견들이 다릅니다. 실장님이 책임지고,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십시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각 부처 차관들과 국정원, 경찰로 팀을 짜서, 매주 수요일마다 회의를 했다. 평택기지 이전 문제로 의회를 설득하는 건 정치인가 관리인가?”

사실 그렇다. 용산 미군기지와 미 제2사단 등을 평택으로 이전하는 사업은 2004년 8월, 한·미 양국이 체결한 협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해 12월 국회 비준동의를 받아야 했다. 국회 동의를 구하는 문제는 당연히 정치영역이다. 관리형 실장이라 해도 어느 정도의 정무감각은 필요한 셈이다.

당시 김 실장을 시민사회수석과 민정수석으로 보좌한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수석 시절 어땠나.
“조용하고, 온화하고, 착한 품성이었다. 큰 눈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걸 들어보면 의지도 강했다. 개인적으로는 문 수석을 몰랐는데, 알고 보니 부인 김정숙 여사하고 우리 집사람이 경희대 성악과 선후배로, 잘 아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같이 연대 생활환경대학원도 다녔다. 집사람과 김 여사는 과거 불우이웃돕기 자선음악회도 몇 년간 같이했다. 나는 문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고 자주 기도를 한다.”
그런 문재인 정부의 1년 6개월을 어떻게 평가하나.
“관심 있는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탈원전, 최저임금제, 주 52시간제 같은 것들이 전부 문제가 되잖나. 갈등과 분쟁 소지가 많은 사안들을 몰아서 올리는 게 참모들 전략인지는 모르겠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또 하나는 인사다.  문 대통령은 탕평인사 한다 했잖나. 그런데 뭐가 탕평인지. 대선 캠프나 민주당 사람을 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안에서 쓰더라도 능력 위주로 적재적소 인사를 하라는 게 내 부탁이다.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노영민 비서실장 임명은 적재적소 인사인가.
“비서실장은 품격이 있어야 하는데, 노 실장은 갖췄다고 본다.”
야권은 노 실장이 의원 시절 회관에 카드단말기를 설치해 시집을 결제한 일 등을 두고 혹평하는데.
“그런가?”
2기 청와대 비서실장을 먼저 지낸 입장에서 충고하고 싶은 말은.
“비서실장은 무조건 성공한 대통령을 만드는 게 첫째 덕목이다. 그러려면 청와대 참모들이 화합하고, 품격을 지켜야 한다. 가급적 앞에 나서지는 않는 게 좋겠다. 장관들의 위상도 지켜줘야 한다. 요즘 공직자들이 복지부동한다는 말이 많다. 청와대가 다 해버리면 공무원들은 뭐하나. 청와대는 ‘토탈 로드맵’을 그려 점검과 조정을 하고, 각 부처가 ‘디비전 로드맵’을 만들어 움직여나가야 한다. ‘디비전 로드맵’은 부처에 맡겨라.”
다양한 인사들을 만나겠다고 각오하고 들어갔는데, 실천했나.
“물론이다. 노영민 실장도 그렇게 몸으로 부닥쳐야 한다. 문 대통령이 경제계 인사를 만나라고 한 얘기는 적절하다. 야당이나 보수 쪽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한다. 만나서 문 대통령의 본심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고….”
그런 방식으로 재직중 갈등과 분쟁을 완화했다고 판단하나.
“쉽진 않았다. 한나라당이 너무 대통령을 몰아붙여 참 정국이 안 풀리더라. 그래서 1년 4개월째(2005년 6월), 결국 노 전 대통령에게 ‘그만둬야겠습니다’라고 했다.”

2005년 6월, 당시 한나라당은 철도공사 유전개발의혹 사건, 행담도 개발의혹 사건 등을 고리로 노무현 정부를 압박해왔다. 그 무렵 김 전 실장은 청와대 들어올 때 노 전 대통령에게 다짐을 받은대로, 스스로 나갈 때를 정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나.
“깜짝 놀라시며 ‘어디 불편한 데가 있습니까’라고 물으시더라. 저는 ‘저를 편애해주신 걸 평생 있지 못할 거다. 하지만 지금 정국에선 새로운 비서실장 카드를 좀 쓰셔야 한다. 차제에 장관도 두 명 정도 바꾸시라’고 건의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영입할 때의 약속도 지켰다. 김 전 실장이 사의를 밝힌 지 두 달 뒤(2005년 8월) 사표를 수리했으니 말이다. 장관을 몇 명 바꾸라는 조언도 사실상 수용했다. 몇 달 뒤 4개 부처 장관을 바꾸는 개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장관을 바꾸면서, 그중 한 자리로 김 전 실장을 다시 불렀다.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 자리였다. 그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쓴소리 실장’으로 유명한데.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청와대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대통령께서 ‘저녁에 막걸리 한잔 마실까요’라고 하셔서, 집들이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소박한 저녁자리를 마련했다. 고건 총리, 고영구 국정원장 등도 초대했는데, 만찬 중 분위기가 무르익자 노 대통령이 음식을 나르던 집사람한테 ‘사모님, 노래 한번 하세요’라고 하셨다. 집사람이 성악을 했지만 대통령, 총리, 국정원장 앞에서 노래하려니 얼마나 긴장했겠나. ‘사랑이여’를 부르다 가사를 잊어서 막혀버렸다. 그때 노 대통령이 옆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받아서 이어주시더라. 집사람은 결국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쌓이니 사람이 가까워집디다. 그렇게 서로 터놓고 지낼 수 있으면, 무슨 말인들 못 하겠나.”

쓴소리라는 게 이처럼 자연스레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저절로 나온다는 얘기였다. 치약처럼 짜내야 나오는 게 아니라.

김우식은…

194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강경상고-연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모교에서 화공과 교수를 지내다 교무처장, 총장을 역임했다. 교무처장 시절 운동권 학생들의방패 역할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리는 이광재 전 강원지사가 그의 화공과 제자다. 현재 창의공학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이낙연 총리 직속 국가안전안심 위원장도 맡고 있다.

강민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