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취재일기

사라진 피맛골의 전철 밟는 을지로 골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한은화 기자 중앙일보 기자
 세운재정비촉진사업으로 철거위기에 놓인 을지면옥의 모습. [사진 연합뉴스]

세운재정비촉진사업으로 철거위기에 놓인 을지면옥의 모습. [사진 연합뉴스]

평양냉면 5대 전설로 꼽히는 서울 을지로동 을지면옥이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놓였다. 노가리 골목의 뮌헨 호프, 양미옥, 조선옥 등 을지로 골목길을 빛내던 노포(老鋪)들과 반세기 역사의 공구상 거리도 같은 처지다. 본지 보도(1월 16일자 2면) 이후 박원순 서울 시장은 16일 서울시 청사에서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무조건 싹 다 밀어내는 형태의 개발은 시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지양하겠다”며 전면 재검토 의사를 밝혔다. 재개발 사업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을지로의 매력을 보존하려면 무엇을 남기고 개발해야 할 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도시재생으로 둔갑한 재개발 #을지면옥 등 사라질 위기 #박 시장 "싹 밀지 않겠다" #철거 앞서 보존 고민해야

관련기사

최근 들어 을지로에는 2006년부터 추진된 세운재정비촉진사업으로 논쟁이 붙었다. 재생이냐, 재개발이냐를 두고서다. 화두를 던진 것은 서울시였다. 2015년께 세운상가 재생사업인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일대 재개발 사업에 ‘재생’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 11일 2022년까지의 서울시정 4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3대 재생사업으로 세운상가 일대를 꼽았다. 산업화 시대에 세워진 노후 건물을 재생하겠다는 취지다. 그리고 공구상 거리의 낡은 건물(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 3-4ㆍ5)을 모조리 철거하고 있다.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고 소문난 을지로 제조 장인들과의 협업을 기대하며 세운상가 일대에 자리 잡은 젊은 작가들은 한순간에 비빌 언덕을 잃었다. 재생일까, 재개발일까. 아무튼 뒤통수 맞아 혼란스러운 을지로 사람들을 달래러 서울시 담당 공무원이 15일 세운상가로 급파됐다. 서울시의 해명은 이랬다.

“오세훈 전 서울 시장 때 을지로 재개발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그걸 집행하는 것뿐입니다. 새롭게 계획을 세운 게 아닙니다. 대규모로 재개발하려던 것을 오히려 소규모 블록으로 나눠 쪼개어 개발합니다.”

재생의 사전적 의미는 ‘낡거나 못 쓰게 된 물건을 가공하여 다시 쓰게 한다 ’이다. 그런데 서울시의 재생은 ‘쪼개서 재개발하는 것’인 모양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세운재정비촉진지구는 세운2구역, 3구역, 4구역, 5구역, 6-1구역, 6-3구역, 6-2구역, 6-4구역 등으로 나눠 재개발된다. 낙후한 건물은 철거되고, 평균적으로 20여층의 새 복합건물이 들어선다. 백남준 작가의 엔지니어로 활동한 이정성 장인이 “차라리 떳떳하게 재개발한다고 해라. 재생이라고 현혹하지 마라”며 분통 터뜨리는 배경이다.

서울 종로 피맛골 자리에 들어선 르 메이에르 빌딩의 모습.

서울 종로 피맛골 자리에 들어선 르 메이에르 빌딩의 모습.

재개발이 천천히 추진되는 동안 을지로는 '핫'해졌다. 젊은 층 사이에서 을지로의 재발견이 이어졌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그 사이사이 보석처럼 박힌 노포 방문 인증샷이 SNS에 넘쳐났다. 레트로풍의 아기자기한 카페와 바도 생겨나며 을지로의 낮과 밤의 모습이 달라지자, 중구청은 을지유람 코스까지 만들었다. 철거 위기에 놓인 을지면옥 이야기가 담긴 박찬일 셰프의 저서『노포의 장사법』에 박원순 시장은 이런 추천사도 남겼다. “나는 이 가게들이 더 오래가기를, 더 늙어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업적 쌓기식 홍보만 있을 뿐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이는 없었다. 노포들이 철거 위기에 놓이자, 중구청은 “을지유람 코스를 바꾸겠다”고 했고, 서울시는 “새로 들어서는 빌딩에 노포들이 입주하면 된다”고 했다.

옛것의 가치를 더 살피는 시대로 시대상이 달라졌다면 인허가권자는 고민해야 한다. 도시는 생명체라, 낡은 것을 새롭게 정비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을지로에는 위험할 정도로 낡은 건물이 많다. 하지만 이를 싹 밀고서 어디서 봄직한 천편일률적인 빌딩을 또 세울 것인가. 재개발을 은근슬쩍 재생이라는 용어로 바꿔 부르는 것은 대안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을지로도 매력 없는 길만 덜렁 남은 피맛골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