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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애 두고 나와 다른 아이들과 실컷 놀아야 하는 직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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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더,오래] 장윤정의 엄마와 딸 사이(6)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아이를 낳기 전엔 조그만 동네 미술교습소를 운영했다. 이제 막 아이들도 모집하고 자리를 잡아갈 무렵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어디다 맡길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까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임신 7개월 즈음까지 1년 정도만 교습소를 운영했다.

20대 초반에 누구나 그렇듯 나의 적성을 찾는 과정으로 회사도 다녀봤고 놀아도 봤고 아르바이트도 해봤다. 그렇게 돌고 돌아 2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즐거운 일, 보람된 일을 찾게 되었고 교습소를 차릴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젊음의 열정 하나로 이루어낸 나만의 공간이었다. 큰돈은 못 벌었지만 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로 무언가 이루어낸 부분에선 다들 대단하다고 했다.

[그림 장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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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루어낸 공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문을 닫게 되니 속이 상했다. 그러나 결혼에 임신에 여러모로 더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땐 막연하게 나중에 ‘또 하면 되지’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아이를 낳고 2년은 일하고 싶다는 생각할 틈도 없이 눈 뜨면 육아인 날을 보냈다. 엄마라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놓을까 말까 고민할 시간조차 없는 그런 정신없는 날들이었다.

아이가 3살이 되자 밤이 되면 자고 제법 사람 먹는 것도 먹고 어린이집도 가게 되었다. 임신 기간 통틀어 약 3년 만에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일하고 싶어졌다. 신랑이 갖다 주는 생활비가 아닌 내가 벌어 내가 쓰는 돈도 필요했고, 집 말고 다른 공간으로 나아가 일도 하고 인정도 받고 성취감도 느끼고 싶었다. ‘나 아직 죽지 않았어’ 같은 마음이랄까.

이미 3년도 충분한데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아무 곳에서도 일할 수 없는 아줌마가 될 것만 같아 조급해졌다. 컴퓨터를 켜고 일자리를 검색했다. 당연히 내가 잘하는 혹은 해보았던 일을 위주로 하나하나 검색어를 넣어 보았는데 급여나 직원복지는 볼 필요도 없이 근무시간과 지역을 우선순위로 볼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집도 내가 보내야 하고 내가 데려와 저녁까지 돌봐야 하는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였다. 신데렐라도 아니고 한 번도 이런 기준으로 구직한 적이 없는데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시간만 맞으면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식으로 찾다 보니 일할 곳이 없었다.

[그림 장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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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만 주면 잘할 수 있는데… 내가 경력도 더 많은데… 급여도 그렇게 많이 바라지 않는데’ 하는 생각들이 들면서 억울했다. 화가 났다. 이대로 평생 집 - 어린이집 - 집 - 어린이집 - 마트 - 문화센터만 드나들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다. 확 삭발이라도 해버릴까, 누가 신경이나 쓸까 싶었다.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하니 점점 시간만 맞으면 무조건 할 거라는, 뭐라도 한다는 오기가 생겼다.

아동미술과 관련 있는 구직을 보다가 집 근처 보육기관에서 보조교사를 모집한다고 했다. 신랑이 오전 오후 30분씩만 거들어 주면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전화해서 면접을 보고 “보조교사 하기엔 경력이 많네요”라고 하기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이 시간이 아니면 다른 곳은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면접도 여기만 보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을 했다. 3월부터 출근하기로 하고 오랜만에 직장이 생겼다는 설렘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들었다. 이게 뭐라고 꼭 아가씨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3월이 되었고 신랑에게 8시 반에는 내가 나가야 하니 9시엔 아이를 꼭 등원시켜 주고 끝나고 바로 집에 오면 4시는 조금 넘을 테니 그 20분 정도를 아이를 데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자영업자인 신랑은 오후 4시쯤 출근해 새벽에 들어온다. 등·하원 정도는 무리 없이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림 장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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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3년 만에 직장인이 된다는 설렘으로 일찍 일어나 씻고 화장도 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출근을 했다. 첫 근무의 기억은 퇴근 시간까지 화장실도 못 갔고 단 5분도 쉬지를 못했다. 교실을 비우면 안 된다고 했다. 정신없는 일과에 등에선 땀이 나고 딸아이는 어린이집에 제대로 갔는지 안 갔는지 전화기 한번 볼 시간이 없었다.

진작에 딸아이는 뗀 기저귀를 몇 명이나 갈아주고 몇 명은 수시로 화장실을 데리고 갔다. 대변을 보면 왠지 딸아이가 자꾸 생각나 집에서 해주듯 휴지나 물티슈가 아닌 물로 다 닦아주고 로션도 발라주었다.

운전석을 등지고 앉아 멀미에 시달리며 하루 두 번, 많게는 세 번 40분씩 동네 차량을 돌며 아이들을 태워주고 내려주고 나서야 퇴근을 했는데 그마저도 늦을까 정류장까지 뛰어가 허겁지겁 버스를 타면 목구멍에서부터 단내 같은 것이 올라왔다. 1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집하고 1분 거리에 있는 신랑 가게에 도착하면 문 잠근 신랑 가게 통유리 틈으로 식당 테이블에 앉은 딸아이가 혼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엄마 왔어” 하고 유리를 통통 두드리면 혼자 가게 문을 못 여는 딸아이는 “아빠! 엄마야, 엄마 왔어!” 하며 문을 열어달라고 안쪽 부엌에 들어가 장사를 준비하는 신랑을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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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지만 ‘이 정도 일은 할 수 있어. 여기서 못한다고 하면 나는 무능력한 사람이야’라는 오기로 그렇게 몇 달을 더 다녔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미안한 마음에 장난감도 더 사주고 쉬는 날엔 월급으로 아이 옷 쇼핑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도 출근을 하다 보니 아가씨 때처럼 꾸미는 재미도 생겼고 힘든 만큼 돈이 주는 여유로운 부분도 있었다.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남편도 내가 일을 하는 게 내심 안쓰럽고 미안했는지 한마디도 핀잔을 주지 않았다 힘은 들었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니 하는 데까지는 하려고 했다.

내가 맡은 반 아이들은 4살로 딸아이와 동갑이었는데 내 업무 중에 당연히 아이들과 놀아주고 책도 읽어주고 나에게 “선생님, 이 놀이 해요” 하면 “어, 그래” 하고 들어줘야 하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놀아주고 칭찬해주고 안아주고 좋아서도 했지만 그게 내 일이어서 한 행동도 많다.

[그림 장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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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 놀자~ 엄마 이거 해줘” 하는 딸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TV를 켜주고 나도 모르게 잠든 날도 있고 괜히 짜증을 내고 미안한 마음이 들면 더 잘 해주기보다 갖고 싶은 거 있냐며 장난감을 사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와 자려고 누웠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아침에 엄마 없어서 혼자 있었어. 어린이집에 안 갔어.” “왜? 아빠는?” 하고 물으니 “아빠는 자. 잠만 자. 안 일어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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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늦게 데려다주고 연락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몇 시간을 혼자 그렇게 있었다는 아이 말에 왈칵 눈물이 났다. 한번은 “엄마, 낮잠을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왔어. 무서웠어. 자고 싶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자라고 했어. 화를 냈어”라고 했다.

엄마는 출근해서 딸아이와 동갑인 아이들과 실컷 놀아주고 뭐든 “그래” 하며 들어주는데…. 그게 내 일인데. 어린 내 딸은 어린이집에서 무서웠단다. 아침엔 혼자 있었고, 기다리던 엄마는 퇴근하고 와서 살갑게 놀아주지도 않는 날들을 아이는 행복했을까.

나 역시도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은 이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조교사를 하며 내 생각 내 교육방식은 아무런 발언권 없이 그저 시키는 데로 “네 네” 하는 일에 자존감이 바닥이 났다. 다음날 출근해서 정말 죄송하다며 그만두겠다고 했다. 새로운 사람을 구할 때까지 7개월 정도 일을 했다. 대실패로 끝난 3년 만의 취업이었다.

친정엄마는 그저 덜 쓰고 아직은 육아에 더 집중하라고 했다. 남편도 잘 챙겨주고 아이 아프지 않게 잘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엄마는 어땠을까. 한 번도 나 같은 생각을 안 했을까?

[그림 장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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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긴 뭘 안 했겠어. 내가 2살이나 됐을까 생각도 안 나지만 엄마는 집에 아파트 아줌마들과 삼삼오오 모여 구두를 만드는 가죽을 본드로 붙이는 부업을 했다. 내가 정말 어릴 땐데도 그 가죽들이 들어있는 핑크색 파란색 소쿠리 같은 게 아직도 얼핏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때 이야기를 하면 가죽을 붙이는 커다란 본드 통이 있었는데 어느 날 친오빠가 그 통을 열고 냄새를 맡고 있어 정말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종종 한다.

그것뿐이랴. 아빠가 일하는 곳에서 공업용 부품에 붙은 비닐 테이프를 제거하는 일도 했다. 그래서 가정집에 보일러에 들어가는 작은 부품이 가득 담긴 커다란 상자가 몇 박스씩 있었고 엄마는 소음을 줄이려고 바닥에 카펫을 깔고 와르르 쏟으며 오빠와 나에게 “자~ 누가 잘하나 해보자~”라며 그 비닐을 까라고 했다.

그런 기억이 가족 안에선 때 되면 한 번씩 이야깃거리가 되는 그저 내가 자라온 환경 경험이었는데. 이번 맞벌이 실패로 다시 그때 생각이 났고 엄마가 왜 그런 부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 왜 그렇게까지 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일을 그만두고 아이가 힘들어하는 날엔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낮잠 자는 일로 선생님과 상담도 했고, 왜 아이 등·하원 하나 도와주질 못해서 이렇게 맞벌이도 못 하게 하느냐는 뾰족한 말 대신 신랑에게도 “내가 일해보니 얼마나 당신이 고생하는지 알겠다. 고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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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언니들은 상황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억지로 하는 맞벌이라는 것이 결과가 어떨지를 뻔히 잘 알기에 시도하지 않았고 나는 기어코 해봐야 하는 사람이기에 해봤고 포기했다. 당분간은 일할 생각이 없다. 뭔가 포기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디 가서 일할 수 없다면 내 상황에서 잘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을 내가 찾아내야지 하는 결심도 하게 했다.

내가 7개월 만에 포기선언을 한 맞벌이를 친정엄마는 몇 년은 해왔다. 이일 저일 참 많이도 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정말 우리 엄마 꽃길 한 번 걸은 적이 없다. 철사를 구부리느라 엄마 등도 같이 구부러졌고 큰 박스를 옮기느라 팔엔 근육도 있다. 젊은 날 얇은 끈 나시에 스커트를 입고 있는 엄마 사진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가느다란 팔, 가녀린 어깨, 얇은 종아리에 젊고 예쁜 엄마.

어째서 엄마라는 존재는 항상 그렇게 강해서 내가 못하고 포기하는 일도 그렇게 악착같이 다 하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힘들면 그냥 하지 말지…. 싫으면 그냥 놔버리지. 정말 신기한 존재다. 아이만 키우고 싶어 전업주부를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것이 행복하고 적성에 맞아서 경제력과 상관없이 정말 스스로 좋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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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처럼 나가서 일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육아는 피할 수 없지만, 육아만 하기엔 너무 답답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가 나처럼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서 일 육아 모두 이끌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 엄마처럼 안되는 상황에서 되게끔 틈새를 공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엄마라고 해서 나아가는 방향이 전부 같지 않다.

나는 지금 ‘육아’라는 직장에 ‘엄마’라는 직급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무언가 하고 싶다. 엄마 시대 땐 자식들이 고생할까 그렇게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앞으로 나의 행복을 위해 좋은 일자리를 찾고 싶다. 그렇게 행복해진 내가 가족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내일도 고민하고 노력할 것이다. 언젠가는 꼭 맞벌이 성공기를 적는 날이 오겠지.

장윤정 주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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