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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접속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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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며 그와 내가 처음 만난 지 올해로 20년째. 말수 적고 숫기 없는 남자와 가까워지는 게 그리 쉽진 않았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함께 한 시간이 쌓여가며 둘 사이 거리도 좁혀져 갔다. 건강과 자녀 교육부터 업무 스트레스까지 터놓지 못할 고민이 없다. 요즘은 볼 때마다 늘어가는 나의 흰머리와 그의 뱃살을 염려해 주며 서로의 나이 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친구가 됐다.

‘랜선 친구’ 넘쳐나는데 진짜 친구는 줄어든 세태 씁쓸 #새해엔 진정한 관계 맺기 위해 ‘상처받을 용기’ 내보길

내가 다니는 미용실 원장 얘기다. 지난 스무 해 동안 그이를 빼곤 누구도 내 머리에 가위를 댄 적이 없기에 벌써부터 난 그의 은퇴 이후가 걱정스럽다. 세계적인 헤어 디자이너 비달 사순이 살아 돌아온다 한들 내 두상과 머리칼의 속성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에 비할 수 있을까. 비단 미용실뿐 아니라 식당도, 병원도 난 늘 가는 곳만 가는 쪽이다. 긴말 하지 않아도 나의 식성과 아픈 구석을 미리 헤아려 챙겨주는 그 익숙함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행복하길 빈다”는 덕담, 많이들 주고받으셨을 게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행복은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연구 결과다. 이 분야 권위자로 꼽히는 에드 디너 일리노이대 교수도 같은 소릴 한다. 아주 행복한 걸로 평가되는 상위 10%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가족·친구·연인 등과 끈끈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거다. 돈의 많고 적음이나 신앙의 유무, 규칙적인 운동 여부 등 다른 조건들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단골을 고집하는 습성을 갖게 된 것도 그네들과의 관계가 주는 행복감 때문인 모양이다. 언젠가 한 지인이 자기는 절대 단골 안 만든다며 “어차피 돈 받고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공연히 그 이상으로 엮이는 게 싫다”길래 혀를 끌끌 찬 적이 있다. 단지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메뉴에 없는 음식도 뚝딱 만들어주고, 반찬 접시가 채 비기도 전에 다시 채워주는 특급 대우를 그는 평생 맛보지 못할 테니 말이다.

‘초연결(hyperconnectivity) 사회’라고들 한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백, 수천, 수만 명과 연결돼 소통하는 세상이라서다. 하지만 이른바 ‘랜선 친구’는 넘쳐나는데 실제로 얼굴을 마주 하고 마음을 나눌 진짜 친구는 갈수록 줄어간단다. 풍요 속의 빈곤이랄까. 아는 사람이 늘수록 되레 외로움은 커지는 역설의 시대다. 혹시 받을지 모를 상처가 두려워 진지한 관계 맺기를 꺼리는 이들이 많아진 탓이다. 대신에 언제 연락이 끊겨도 딱히 섭섭해하지 않을 얕고 넓은 인맥 쌓기에 연연할 뿐이다.

남녀 사이에 연애 안 하고 ‘썸’만 타는 풍조가 만연한 것도 아마 그래서 아닐까. 내 감정이 상대의 감정보다 커지면 다칠까 봐 조심조심 ‘밀당’만 하다 만다는 거다. 하지만 일찍이 관계 맺기의 정수를 그려낸 『어린 왕자』에서 생텍쥐페리가 얘기했듯, 길들임을 통해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 다만 왕자가 장미꽃 때문에, 여우가 왕자 때문에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건 언제든 눈물 흘릴 일을 겪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4시에 네가 오니까 3시부터 한없이 행복해지는’ 기분 따위 절대 느낄 수 없을 터다.

그러니 앞으론 두루뭉수리로 행복을 비는 대신 “부디 좋은 관계 맺길 바란다”는 새해 인사를 건네볼까 한다. 물론 그 바람이 이뤄지려면 너나없이 ‘상처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설사 어떤 관계로 인해 아픔을 겪더라도 훌훌 털고 일어나 새로운 관계를 찾아 나설 수 있는 단단한 마음가짐 말이다. 결코 쉽지 않다는 것 잘 안다. 하지만 인생에서 거저 얻어지는 게 무엇 하나라도 있던가. 2019년은 모두들 행복을 위해 있는 힘껏 용기 내는 한 해가 되시길!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