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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살게 된 쇼팽 고급병 걸려…귀족과 어울리며 돈 펑펑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6)

쇼팽 일가가 살았던 색손궁의 1800년대 후반기의 모습. 색손궁은 2차 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파괴됐다. ⓒ공개도메인 [출처 wikimedia]

쇼팽 일가가 살았던 색손궁의 1800년대 후반기의 모습. 색손궁은 2차 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파괴됐다. ⓒ공개도메인 [출처 wikimedia]

쇼팽이 태어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아버지 미코와이는 중등학교인 바르샤바 리세움에서 프랑스어 교수직을 얻었다.  폴란드의 주요한 교육기관이었던 리세움은 그 무렵 정부주도로 프랑스식 교육체계를 도입, 개편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어 교수가 필요했다. 쇼팽 일가는 바르샤바로 옮겨갔고 프레데릭은 생애의 반을 그곳에서 보냈다.

프레데릭이 태어났을 무렵 폴란드는 나폴레옹의 부침에 따라 흔들리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도 불안한 때였지만 쇼팽 아버지는 규칙적으로 급여가 지급되는 공공기관의 일자리를 갖게됐다.

리세움이 있던 곳은 색손(Saxon. 폴란드 이름은 Saski) 궁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없지만, 색손궁은 바르샤바 중심에 자리 잡은 폴란드의 주요한 궁전이었다. 뒤로는 넓은 정원이 있고 앞으로는 색손광장(현재 피우츠스키 광장)을 둘러싼 ㄷ자 형태의 바로크식 건물이었다.

쇼팽이 태어나기 약 100년 전 폴란드를 다스렸던 아우구스투스 2세가 기존  건물을 사들여 대대적으로 증축했다. (독자들은 아우구스투스 2세를 나중을 위해 기억해 주기 바란다)

색손궁은 1797년 이후 정부소유가 돼  공공기관이 입주해 있었는데 당시에는 리세움과 그곳 교수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쇼팽 가족은 궁의 왼쪽 건물 2층에 입주했다. 허름한 농가주택에서 태어난 쇼팽이 성공한 아버지 덕에 바르샤바 궁전에 살게 된 것이다.

1824년의 카지미에즈 궁의 모습. 얀 피바르스키 석판화,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소장. [사진 송동섭]

1824년의 카지미에즈 궁의 모습. 얀 피바르스키 석판화,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소장. [사진 송동섭]

1816년 바르샤바 대학이 설립되었고 바르샤바 대학이 색손궁을 사용하기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리세움은 근처의 카지미에즈 (Kazimierz. 폴란드 이름은 Kazimierzowski) 궁으로 옮겼다. 아우구스투스 2세보다 앞선 카지미에즈 왕이 건립한 이 궁은 바르샤바를 가로지르는 비스와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진 곳에 있었고 역시 앞뒤로 넓은 정원이 딸려있었다.

쇼팽 가족은 카지미에즈 궁의 오른쪽 건물 2층으로 들어갔다. 쇼팽은 궁의 중앙 건물에 자리 잡은 리세움에 다니며 지브니와 엘스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본 시리즈 5편 참조) 프레데릭은 궁의 긴 회랑을 따라 집과 학교를 왔다 갔다 했었는데 그 회랑에는 수십만 권의 책이 꽂혀있었다고 한다.

성공한 중산층으로 궁전에 살았지만 경제적 형편이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미코와이는 빠듯한 살림에 보태려고 군사 학교에서 프랑스어 강사로도 일했고 어머니 유스티나는 지방 출신 학생 5~6명에게 하숙을 쳤다.

쇼팽의 집은 카지미에즈 궁에서 더 넓어졌다. 약 30평 정도로, 방은 4개에 거실과 부엌이 있었다고 한다. 크지 않은 방들을 한 개는 미코와이 부부가 쓰고 다른 한 개는 프레데릭의 누이 세 자매가 썼다고 보면 나머지 2개의 방을 프레데릭과 하숙생들이 나누어 썼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같은 곳에서 먹고 자고 뛰어놀았을 테니 대부분 귀족의 자제였던 그들 하숙생과 프레데릭은 가까운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쇼팽이 일평생 깊은 속내까지 털어놓을 수 있었던 친구는 이 시절 친구뿐이었다. 솔직한 심정을 편지로 털어놓은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와 프레데릭이 약혼까지 하게 되는 마리아 보진스카의 오빠 카지미르 보진스키(※) 등이 쇼팽 가의 하숙생이었다. 훗날 파리 시절 중요한 친구였던 율리안 폰타나, 얀 마추진스키 등은 리세움의 동급생이었다.

프레데릭은 방학 때면 친구들을 따라 그들 가문의 영지가 있는 시골에 가서 머물기도 했었는데 자파르니아 지방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바르샤바의 궁전에서 자란 그는 시골 농부들의 삶을 그곳에서 처음 접했다. 그는 농민들의 혼례식과 축제를 흥미 있게 관찰하였고, 특히 그곳 민속 음악에 큰 감흥을 느꼈다. 토속 노래를 듣기 위해 시골 처녀에게 동전 몇 푼을 집어주기도 했다.

이때의 민속 음악은 훗날 그가 작곡한 마주르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쇼팽이 리세움을 졸업하고 엘스너가 교장으로 있는 음악원에 들어간 이듬해에  막내 여동생 에밀리아가 세상을 떠났다. 에밀리아는 문학에 재능을 보인 아이였지만 병약했다.

한 해 전 쇼팽 가족은 프레데릭과 에밀리아의 건강을 위해 바르샤바에서 멀리 떨어진 온천을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에밀리아는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프레데릭도 폐가 약했다. 동급생들은 귀족적 자태에 창백한 모습의 그를 기억했다.

1900년 전후의 쿠라신스키 궁. ⓒPublic Domain [출처 미국 의회 도서관]

1900년 전후의 쿠라신스키 궁. ⓒPublic Domain [출처 미국 의회 도서관]

바르샤바에서의 마지막 4년 동안 프레데릭의 집은 크라신스키(Krasinski) 궁이었다. 이 궁은 17세기 말에 건립된 이후 폴란드의 여러 부호의 손을 거쳤다. 그러면서 소유 가문에 따라 이름도 바뀌었는데 당시에는 크라신스키 가문의 소유였다. 쇼팽가는 잃어버린 막내딸의 기억을 지우려고 이곳 남쪽 별관 2층에 세를 얻어 이사 갔다. 그 건물 뒤로도 큰 정원이 딸려있었다. 쇼팽 가족의 공간은 더 커졌다. 프레데릭은 처음으로 자기 방을 가졌다.

쇼팽이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던 시절의 바르샤바는 중심부에 궁전들과 저택, 성당 등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그 중심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다 쓰러져가는 목조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쇼팽 가족이 살았던 곳은 리세움, 바르샤바 대학, 바르샤바 음악원 등이 몰려있는 폴란드의 문화와 지성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그곳에 모여들었고, 그들 중 다수는 아버지 미코와이의 친구였다. 그들은 프레데릭 곁에서 그 시절 피어오르던 새로운 사상과 사조에 관해 얘기했다. 그러한 환경은 청년 쇼팽이 자신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가는데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프레데릭 쇼팽은 공원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석조 궁전에서 귀족 가문의 아이들을 친구 삼아 자랐고, 부유한 실력자들에게 초대받아 화려한 마차를 타고 저택들을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항상 박수와 칭찬을 받았던 어린 아들이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 때문에 아들 쇼팽은 정돈된 외모에 세련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친구뿐만 아니라 권력과 재력을 갖춘 귀족들 사이에서도 잘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또 다른 면의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의 외양과 씀씀이에 대한 것이었다. 빈손의 이주민 출신 아버지는 성실과 절제로 이국땅에서 성공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책임감을 보였고 평생 근검한 생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모차르트나 리스트의 아버지처럼 아들의 재능을 돈벌이에 이용한 아버지가 아니었고 집을 떠나 외국에 있는 다 큰 아들에게도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17세의 쇼팽. 엘리사 라지비우 Elisa Radziwill 의 연필 스케치. 바르샤바 쇼팽기념관 소장. ⓒPublic Domain [사진 송동섭]

17세의 쇼팽. 엘리사 라지비우 Elisa Radziwill 의 연필 스케치. 바르샤바 쇼팽기념관 소장. ⓒPublic Domain [사진 송동섭]

반면 높은 곳에서 자란 아들은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했고 자신의 뿌리인 농부의 삶, 서민의 진정한 생활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시골 자파르니아에서도 그들의 삶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그저 관찰자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부유한 귀족들 속에서 그들처럼 행동하고 그들과 눈높이를 맞춘 프레데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귀족적 취향까지도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것에 최고급만 고집했고, 씀씀이는 무절제하고 요령이 없었다. 이것은 아버지 성공의 그림자였다.

※ 폴란드인의 이름 중에 ‘~스키’로 끝나는 성(姓)이 많다. ‘~스키’ 성을 가진 집안의 여성의 이름은 ‘~스카’이다. 마리아 보진스카의 오빠는 카지미르 보진스키, 어머니는 테레사 보진스카였다. 나폴레옹의 연인이었던 마리아는 윙친스키 가문의 딸로 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윙친스카였고 발레프스키 백작과 결혼한 후에는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되었다. ‘~스키’ 이름을 가진 러시아인은 폴란드 출신 이주민일 가능성이 높다.

송동섭 스톤월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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