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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민의 시선

20대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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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여권이 20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곡선을 가파르게 몰아가는 기폭제가 되고 있어서다. 특히 20대 남자의 이탈이 가파르다. ‘지식 소매상’을 자처한 인사가 칭얼대는 아이 달래듯 “자기들은 축구도 봐야 하는데 여자들은 축구도 안 보고...” 운운했다가 된서리를 맞은 게 얼마 전이다. 20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촛불 광장을 거치면서 정치 세력화됐다. 문재인 정권 탄생의 견인차다. 집권 세력의 입장에서 이들의 반란이 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586은 이념·진영 중시, 20대는 현실적 실용주의 #현실 외면한 정책, 내로남불 바꿔야 지지 회복 가능

20대의 이탈이 일시적 현상일까. 여론조사 전문가들 사이에선 “시장 마찰적인 소득주도성장론, 북한에만 매달리는 평화 정책, 복지 확장 등 정책의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20대의 지지율 회복을 장담하긴 쉽지 않을 것”(배종찬 R&R본부장)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1월 첫째 주 여론조사에서 20대의 46.2%가 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긍정 평가(43.4%)를 뛰어넘었다. 불과 1년 전 전폭적 지지(82.9%)를 보냈던 것과 비교하면 반 토막 수준이다. 20대의 ‘이유 있는 반항’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과거 20대는 ‘진보’의 상징이었다. 현 집권 세력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586세대가 특히 그랬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586세대는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통해 거대한 신념 공동체로 확장됐다. 자신들은 순결하고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 선민의식, 다른 이들이 안락한 삶을 추구할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젊음을 희생했다는 소영웅주의와 보상 심리, 생각이 다르면 적대시하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는 핍박받는 소수자 시절이던 이때 싹텄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탄생하지 말았어야 할 집단으로 죄악시하는 프레임은 끈끈한 이념적 동지 관계를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게 한 모티브가 됐다. 20대와 586세대가 충돌하는 결정적 지점이 이 부분이다.

1990년대에 태어난 20대는 청소년기에 경제, 사회, 정치적 급변기를 경험한다. IMF 외환위기 때 아버지나 삼촌의 실직을 겪었다. 입시 경쟁과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에 내몰리고 평생 벌어서 집 한 채 마련할 수 없을 것 같은 팍팍한 삶과 마주하면서 이념을 좇기보다 현실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자로 무장됐다.

시선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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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두잇서베이가 20대 성인 100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2018년 12월 21~25일)에서도 20대의 탈이념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64%가 ‘생활비 등 경제적 지원’을 꼽았다. 이 또래에 가장 관심이 클 법한 이성관계(11%), 우정(3.8%)은 뒷전이었다. 또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9.4%가 ‘중도’라고 답했고 ‘진보’는 24%에 그쳤다. ‘보수’는 16%였다.

이상 vs 현실, 국가주의 vs 개인주의, 이데올로기 vs 실용의 충돌…. 마주 달리는 기관차처럼 30년의 시차를 두고 부모-자식으로 만난 586과 20대의 간극은 이처럼 뿌리 깊고 근원적이다. 임시방편적 쇼나 감성팔이식 이벤트로 등 돌린 20대의 지지를 되돌릴 수 없을 것이란 얘기다. 개발시대가 닦아놓은 경제 호황과 고속 성장의 수혜를 누린 586세대는 복지를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는 걸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고속성장을 한번도 맛보지 못한 20대는 다르다. 조사에 의하면 ‘경제 성장보다 복지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하느냐’는 질문에 절반가량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서울대 폴랩·사회발전연구원)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 20대는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란 걸 체득한 것이다. 기회의 공정을 요구하고 무임승차와 꼼수를 배척한다. 국가적 행사란 이유로 정부가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일방적으로 결정한 데 분노한다. 땀 흘린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을 ‘금수저’쯤으로 여기는 데서 586과의 엄청난 괴리를 드러냈다.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에 대해 ‘나쁜 머리 쓰며 의인인척 위장한…’이란 글을 올린 여당 의원이 ‘18원 후원금’ 부메랑을 맞고 있다. 댓글 상당수가 ‘국정농단을 폭로한 고영태를 의인으로 칭송했던 위선에 화가 난다’(고파스 게시판)는 내용이다.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정유라 글에 분노해 탄핵 촛불에 가세했던 바로 그 20대들이 여당의 위선과 꼼수를 지적하고 있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 티끌만 탓하는 내로남불, 이제 그만두라는 주문이다. 부작용과 혼란에도 자신들만 옳다며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도그마, 자신들은 순결하다고 믿는 위선적 우월주의와 결별하라는 요구다.

문 대통령은 어제 신년 기자회견에서 “20대의 지지도가 낮다면 정부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과연 20대가 위안을 얻었을지는 미지수다.

이정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