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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통령의 귀를 붙잡은 이들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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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윤호 기자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대표
남윤호 일본 순회 특파원

남윤호 일본 순회 특파원

“자세한 내용은 우리 정책본부장하고 토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2017년 4월 대선 후보 토론회를 봤다면 기억할 것이다. 일자리 공약의 재원에 대한 유승민 후보의 질문에 문재인 후보가 한 말이다. 겸손하다던 저 분도 이젠 바뀌었구나 싶었다. 유 후보도 언짢은 표정이었다. “이런 오만한 토론 태도가 어디 있습니까.”

고용참사에도 정부는 “기조 유지” #유리한 지표만 보는 건 인지상정 #정부는 나쁜 지표에 더 민감해야 #모르면 전문가에 맡겨야 할텐데 #경제부총리가 사령탑 기능 못하니 #새 비서실장이 현실감 불어넣길

돌이켜보면 굳이 나쁘게 볼 필요는 없었다. 다음 토론회에서 곧 사과했으니 말이다. 그가 정말 안하무인이었다면 그랬겠나. 진짜 몰라서, 순수한 마음으로, 잘 아는 분과 생산적인 얘기를 하라는 뜻이었으리라. 잘 모르는 이슈를 놓고 몰리다 보면 그럴 수 있다. 더구나 유 후보는 경제학 박사 아닌가. 머리를 빌려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그 정도는 허용된다.

문 후보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경제에 대해선 좀 불편한 모습을 보였다. 취임 초엔 권력의 서슬에 가려 잘 안 보였지만 요즘엔 제법 눈에 띈다. 경제에 대한 발언내용의 진폭이 커졌다. 지난해 말 ‘물 들어온다’ ‘지표가 견조하다’고 했다가 곧 ‘경제상황이 엄중하다’고 방향을 바꿨다. 그러다 연말엔 가짜뉴스에다 프레임론까지 꺼내며 경제성과 홍보를 강조했다. 어제 회견에선 “경제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보고 있다”면서도 정책기조는 그대로 유지한다고 했다. 경제가 얼어붙었는데 기조를 유지하는 자신감의 근거가 뭐냐는 질문은 사실상 거부했다. 이미 많이 설명했으니 새로운 답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는 식이었다. 입력된 내용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인상도 줬다.

지표는 객관적이지만 그 해석은 주관적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불편한 건 외면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정책 담당자들은 달라야 한다. 열개의 지표 가운데 아홉이 좋고 하나가 나쁘다면, 그 나쁜 지표에 주목해야 한다. 위기는 작은 틈에서 번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 시작을 놓치면 수습이 힘들어진다.

중앙시평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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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 정책 담당자들은 거꾸로다. 유리한 지표를 찾아내거나, 좋지 않은 걸 굳이 좋게 해석하려 든다. 청년실업률은 두 자릿수로 치솟았는데도 청년고용이 나아졌다고 하는 게 전형적이다. 하지만 그제 나온 통계청의 고용지표는 그야말로 참담한 수준 아닌가. 청년고용률이 사상 최고라느니, 민간소비가 늘었다느니, 프레임 탓이라느니, 하는 말에 국민이 납득하겠나. 도쿄 주재 기업인들도 가끔 서울에 다녀올 때마다 싸늘해진 경제상황을 실감하겠다고 입을 모은다.

대통령의 경제인식은 보좌진의 입력에 좌우되기 쉽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한 사람이 줄곧 일관성 있게 입력하고 있다고 보기 의심스러울 정도다. 최저임금에 대해서도 속도를 조절할 듯하다 마이웨이로 가지 않았나. 혹시나 하던 기업인들의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런 게 반복되면 정책의 예측가능성과 신뢰도가 떨어진다. 누구 잘못인가. 대통령의 귀를 붙잡고 있는 이의 책임이 크다.

대통령이 경제에 서툴다고 문제될 건 없다. 전문가의 말을 잘 듣거나, 잘 맡기면 된다. 일일이 직접 챙기기보다 믿을만한 부총리를 골라 경제 사령탑으로 쓰는 게 낫다. 그럼 이 정부의 경제부총리가 과연 명실상부한 사령탑인가. 솔직히 ‘컨트롤드 타워’라 하는 게 어울리지 않나. 국채 발행에 대한 청와대 압력, 김동연 전 부총리의 정무적 판단 등과 관련한 전직 사무관의 폭로 이후 그런 인상이 더 짙어졌다.

눈치가 뻔한 우리 사회에선 누가 힘 있는지 금방 안다. 출중한 정무감각으로 무장한 관료들은 권력의 코드에 맞춰 정책을 만들어 대령한다. 그 결과가 어찌 됐는지는 지난 2년 간 다 드러나지 않았나. 위만 보고 가면 아래가 안 보이고, 아래만 보고 가면 앞이 안 보이는 법이다. 권력만 보고 가면 민생이 안 보이고, 여론만 좇아 포퓰리즘으로 가면 앞길을 잃는다. 지금 우리 정부, 정치권이 그 형국 아닌가. 눈 먼 자들의 행진을 봐야 하는 국민이 고달플 따름이다.

이런 때일수록 보좌진을 총괄하는 노영민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는 과거 의원실에 카드 단말기를 비치해 저서를 팔다 비판받은 바 있다. 야당은 몇 년 전의 일을 다시 끄집어내 그를 공격하지만, 꼭 그럴 일은 아니다. 근본주의 이념파가 득세하는 요즘엔 차라리 플러스일 수 있다. 상인적인 현실감각, 섬세한 고객 마인드로 청와대의 경직된 분위기에 숨구멍을 뚫으라는 얘기다. 대통령에게 이념적 경제관을 심어주는 스태프를 솎아내라는 뜻이다. 어제 회견장에서 나타난 대통령의 경제 인식을 보니 그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남윤호 일본 순회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