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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로드] 섬에선 환경에 적응하고 활용한 자연주의 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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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우리나라 김장의 실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10월 말~12월 중순 전국 9곳의 현장을 찾아다녔다. 자연환경에 따라 ▷동부 산간지역 ▷서부 평야지역 ▷동서 해안지역 ▷섬 지역 4개 권역으로 나눠 살펴봤다. 지역별 김치는 대동소이(大同小異)했지만, 작은 특성이라도 찾아보려 노력했다. 이번 주에는 섬 지역인 제주도와 강화 교동도의 김장을 소개한다.

제주 김지순 명인 “사철 쌈 채소 있어 김장은 간단히 조금만”  

대부분 가정에서 김장은 겨울나기 준비의 핵심과업이지만 제주 사람들은 김장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집에 딸린 ‘우영밭’(텃밭)이나 들판 노지 밭에 싱싱한 채소가 사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밥상에는 사계절 쌈이 오른다. 섬 안에서 나는 거로 자급자족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이 허락한 물산을 최대한 식재료로 활용했고, 배춧잎∙콩잎∙양하잎∙칡잎 같은 걸 쌈으로 먹었다. 쌈이 오르는 상에는 언제나 된장과 멸치(자리)젓이 따라왔다.
채소를 늘 쌈으로 먹었기 때문에 화학비료가 없던 시절 제주에서 채소 거름으로 삭힌 오줌만 사용했다고 한다. 선조들이 어찌 알았는지 모르지만, 기생충을 예방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인분은 돼지가 먹거나 돼지우리 바닥에 떨어져 주기적으로 깔아주는 마른 풀에 섞여 쌓인다. 초봄이면 우리에 쌓인 것을 깨끗이 걷어내 마당 한쪽에 두엄으로 쌓아 놓으면 속에서 열(60~70도)이 나면서 발효된다. 사람에게서 출발한 기생충 문제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일정 부분 해결된 듯하다. 그래도 이런 거름은 채소밭에는 주지 않고 조나 보리밭에 냈다. 생채소를 많이 먹는 생활환경에서 나름대로 위생을 챙긴 것이다.
쌈 덕분에 김치를 오래 저장해두고 먹을 필요가 없었고, 그 바람에 김치가 발달하지는 않아 종류가 다양하지도 않다. 그래도 고려∙조선 시대 유배객들이나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제주에 머물다 가면서 육지의 김치 문화를 전파해 김치∙김장의 형식은 생활 속에 자리 잡았다.
김장 시기는 12월 후반에 하되 예로부터 동지(12월 22~23일)를 넘기지 않은 거로 전해졌다. 동지가 지나면 ‘뿌리가 움직인다’고 했다. 아마 배추가 쇤다는 말인 듯하다. 김장 양은 많이 하지 않았다. 중간 항아리로 하나쯤 한다. 가족이 정월 대보름(음력)까지 50~60일 먹을 만큼, 평소 김치 담그는 것보다 조금 더 하는 정도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엔 제주도 기온이 높아 오래 보관하기 어렵고, 사철 생채소가 노지에 있기 때문에 추운 육지 가정보다 김치 소비량이 적어 많이 담글 필요가 없었다.
짧은 기간 김장 김치를 먹고 2월 중순이면 동지김치를 새로 담가 먹는다. 이른 봄에 노지에서 월동한 ‘퍼대기 노물’이라 부르는 봄동에서 꽃대가 올라온 상태를 동지나물이라 한다. 김치나 나물로 먹는다. 봄동 배추 잎과 부드러운 꽃대까지 수확하여 담근 김치가 동지김치다.
제주에서는 여름철 참외를 따 먹고 난 밭에 배추∙무 씨를 뿌려 싹이 나면 조금씩 솎아 먹다가 남은 배추 포기로 김장을 한다. 일부러 씨를 배게 뿌려 솎아서 먹었다. 잎은 쌈이나 국거리로 먹고, 뿌리도 뽑아 음식에 썼다.

김지순 제주향토음식명인이 제주도식 김장 김치 담그는 과정을 시연했다. 재료는 간단해 포기가 작고 잎은 상추처럼 퍼지는 비결구형 재래종 배추와 쪽파, 멜젓 진젓(생젓국), 소금, 차조 풀국, 좁쌀, 다진 생강과 마늘, 고춧가루가 놓여있다(왼쪽 위부터 나선형 시계방향). 신인섭 기자

김지순 제주향토음식명인이 제주도식 김장 김치 담그는 과정을 시연했다. 재료는 간단해 포기가 작고 잎은 상추처럼 퍼지는 비결구형 재래종 배추와 쪽파, 멜젓 진젓(생젓국), 소금, 차조 풀국, 좁쌀, 다진 생강과 마늘, 고춧가루가 놓여있다(왼쪽 위부터 나선형 시계방향). 신인섭 기자

배추는 육지에서 김장에 쓰는 결구종(속줄기가 둥글게 뭉치는 종류) 통배추가 아니라 포기는 작고 잎은 상추처럼 퍼져 결구(結球)되지 않는 재래종이다. 푸른 잎이 많고 포기는 얼갈이배추보다 약간 크다 싶게 작지만, 줄기가 가늘고 물기는 적어 질긴 듯 아삭아삭 씹히면서 맛은 고소하다. 포기가 아주 큰 것이 아니면 쪼개지 않고 통으로 절여 김치를 담근다.
예전 바닷가에서는 바닷물에 절였다. 12월 중순께 배추를 뽑아 지게로 져 날라 바닷물에 담가 돌로 눌러 놓고 1~2일 초벌 절인 후 건져서 집으로 가지고 와 항아리에 담은 바닷물에 소금을 풀고 3~4일 더 절였다. 전체적으로 5~6일 절여서 김장했다고 전한다.
절일 때 천일염을 쓰는 것과 바닷물을 이용하는 건 차이가 있다. 천일염은 짧은 시간에 강제로 절이는 방식이다. 소금의 질이 김치 맛에 큰 영향을 미친다. 바닷물로 절이면 낮은 염도에서 배추의 수분을 천천히 빼내게 된다. 수분이 많은 제주 배추로 아삭한 김치를 담그는 제주 사람들의 방법이었다. 이렇게 담근 제주 김치는 봄철 군내가 날 정도로 과숙해도 물에 씻어서 쌈 채소처럼 밥을 싸 먹으면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살아있었다.
지난해 10월 23일 제주에 갈 일이 있었다. 가기 전에 제주도 지정 향토음식명인 제1호이자 유일한 명인인 김지순(83) 선생에게 제주 김장에 대한 설명과 담그기 시연을 요청했다. 선생의 아들이면서 향토음식 연구의 대를 잇는 양용진(54) 제주음식문화연구원 원장에게도 졸랐다. 가까스로 허락을 얻어 제주 당일 일정 중 오후 3시에 제주시 노형동에 있는 ‘김지순요리제과전문학원’으로 찾아갔다. 3층 연구실에 모든 재료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태(‘자배기’의 제주도 말)에 좁쌀과 차조 풀국을 붓고 양념을 갤 준비를 하는 김지순 명인. 배추는 포기가 작아 5시간쯤 절였다. 신인섭 기자

장태(‘자배기’의 제주도 말)에 좁쌀과 차조 풀국을 붓고 양념을 갤 준비를 하는 김지순 명인. 배추는 포기가 작아 5시간쯤 절였다. 신인섭 기자

양념은 단출했다. 고춧가루, 생고추, 멸치젓 진젓, 좁쌀과 좁쌀 풀죽, 쪽파, 마늘, 생강을 준비했다. 한라산에서 나는 표고버섯을 넣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김치를 담그는 가정은 없다고 한다.
고춧가루는 조금만 넣는다. 제주에는 고춧가루가 아주 귀했다. 제주 고추는 당도가 높아 벌레가 들끓었다. 재배해도 빨갛게 익은 고추의 수확은 아주 적었다. 겨우 익어도 기후가 습해 건조기가 없던 시절에는 제대로 말리기 어려웠다.고추를 가루로 빻아 보관하면 온∙습도가 높은 기후 때문에 곰팡이가 피고 쉽게 변질했다. 그래서 고춧대에 매달린 채로 말려 처마 밑에 걸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몇 개씩 따다가 돌확에 빻아 사용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고춧가루를 장만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김치에도 많이 넣을 수 없었다. 요즘엔 농사 자재도 좋고 농업기술이 발달해 고추가 조금은 나는 편이다.
제주에는 새우젓이 없어서 계절에 따라 멸치젓이나 자리젓을 썼다. 멸치젓은 봄 제철에 멸치 10㎏에 소금 2㎏ 비율로 버무려 항아리에 담아 4~5개월 두면 살은 삭아 위로 국물이 뜨고 뼈는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 젓국을 진젓(생젓)이라고 한다. 액젓을 만들 때는 멸치젓을 끓여서 소쿠리로 거른다. 봄에 담근 멸치젓은 봄 멸치젓, 가을에 담그면 추젓이라 한다.
예전에는 바닷물에 배추를 절였지만, 소금으로 하는 요즘은 포기가 작아 대략 5시간쯤 절인다.좁쌀 풀국도 미리 쑤어 두고, 마늘∙생강도 다져 놓는다. 쪽파는 3~4㎝ 길이로 자른다.

쌀이 귀한 제주에서는 보리살과 좁쌀이 주곡이었다. 김치에도 찹쌀 죽 대신 좁쌀을 넣었다. 장태 바닥에 좁쌀이 보인다. 신인섭 기자

쌀이 귀한 제주에서는 보리살과 좁쌀이 주곡이었다. 김치에도 찹쌀 죽 대신 좁쌀을 넣었다. 장태 바닥에 좁쌀이 보인다. 신인섭 기자

준비가 끝나면 장태(자배기의 제주 말; 항아리 뚜껑 같은 오지그릇)에 좁쌀 조금과 좁쌀 풀국을 붓고 고춧가루 넣어 불리면서 생고추 간 것도 약간 추가한다. 여기에 진젓∙마늘∙생강을 넣고 비빈다. 마지막으로 쪽파를 넣은 다음 양념 재료가 불어 섞이면서 맛이 잘 어우러지도록 버무린다.

제주에는 고추가 귀했다. 김치에도 고춧가루를 조금만 넣었다. 신인섭 기자

제주에는 고추가 귀했다. 김치에도 고춧가루를 조금만 넣었다. 신인섭 기자

풀국에 고춧가루를 개고 멜젓 진젓을 넣고 있다. 신인섭 기자

풀국에 고춧가루를 개고 멜젓 진젓을 넣고 있다. 신인섭 기자

다진 생강과 마늘·쪽파를 넣고 버무리면 김칫소 만들기가 끝난다. 신인섭 기자

다진 생강과 마늘·쪽파를 넣고 버무리면 김칫소 만들기가 끝난다. 신인섭 기자

버무린 양념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맛이 칼칼하고 진하면서 구수했다. 잘 발효된 젓갈의 동물 단백질 감칠맛과 좁쌀 죽 탄수화물의 구수함이 서로의 맛을 지지해주는 느낌이다. 김 명인은 “차조가루로 풀국을 끓여 더 구수하다”고 설명했다.

다 버무린 김칫소. 신인섭 기자

다 버무린 김칫소. 신인섭 기자

양념 배합이 끝나면 절인 배추에 버무린다. 김칫소에 무채나 갓이 안 들어가니까 양념을 배추 갈피마다 넣을 게 없다. 줄기에 묻히거나 바르는 정도로 김치 담그는 과정은 끝났다.
제주 김치는 물기를 적게 담그는 게 중요하다.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높아 물이 많으면 마구 끓어 넘친다. 배추와 양념을 버무린 장태(자배기)에 묻은 양념을 헹궈 김장 항아리에 붓는 것도 하지 않을 정도다. (※한반도 전체로 볼 때 남으로 갈수록 김치에 물을 적게 잡고, 북으로 갈수록 물이 많게 담근다. 평안도나 함경도는 물김치에 가깝게 담가 냉면이나 김치말이에 사용한다.)

김지순 명인이 절인 배추에 준비한 김칫소를 넣고 있다. 넣는다기보다 줄기에 옅게 바르는 정도였다. 신인섭 기자

김지순 명인이 절인 배추에 준비한 김칫소를 넣고 있다. 넣는다기보다 줄기에 옅게 바르는 정도였다. 신인섭 기자

김칫소 버무리기가 끝나자 겉잎으로 포기를 감싸고 있다. 신인섭 기자

김칫소 버무리기가 끝나자 겉잎으로 포기를 감싸고 있다. 신인섭 기자

양념을 버무린 김치를 항아리에 쟁일 때 무를 3㎝ 두께로 토막 쳐 절이고 김치 양념을 살짝 발라 켜켜이 번갈아 담가 익혀 먹기도 한다. 김 명인은 “요즘 사람들은 좁쌀 죽 끓여서 김치 담그는 것을 잘 모른다. 김치냉장고가 있어서 김치도 제주도 방식은 잊히고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퍼지는 전국 표준화 방식을 따라가 향토색은 점차 실종되고 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무 절여 케첩 버무려 놓고 깍두기라 할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제주 음식은 재료 맛으로 먹는 쪽으로 발달했다. 싱싱한 해산물과 채소류가 풍부해서 그렇기도 했고, 양념이 된장∙간장밖에 없는 것도 이유다. 고춧가루가 귀해 고추장은 없었다. 김 명인은 “요즘엔 생선조림을 양념 범벅으로 해서 팔고 그걸 제주도 별미라고 먹지만, 옛날엔 생선 한 마리 조리는 데 고춧가루 반 숟갈밖에 넣지 않았다”고 음식 시속의 변화를 증언했다.

완성된 제주 김치. 통이 작은 비결구형 재래종 배추로 담가 김치 포기가 작다. 신인섭 기자

완성된 제주 김치. 통이 작은 비결구형 재래종 배추로 담가 김치 포기가 작다. 신인섭 기자

 이 밖에도 제주 김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양용진 제주음식문화연구원장 자료).
▷꿩마농 짐치: 봄철에 캔 달래에 고춧가루와 멸치젓으로 양념한 김치.
▷놈삐 짐치: 무를 일컫는 제주도 말이 ‘놈삐’다. 겨울철 무를 크게 썰어 통배추 김치 사이에 박아 놓고 한 달 이상 묵혀서 먹는데 제주의 겨울 무는 단맛이 풍부하고 수분이 많아서 간식 삼아 그냥 깎아 먹기도 했다.
▷갯노물 짐치: 겨울철 갓을 충분히 절이고 멜젓을 많이 넣고 담가서 푹 삭혀서 먹는데, 제주 갓은 크기가 작고 부드러워서 남도의 갓김치처럼 많이 삭히지 않아도 비교적 빨리 맛이 들었다.
▷솎음배추 짐치: 잔뿌리가 실처럼 달린 가을철 어린 배추를 식초와 고춧가루로 버무린 겉절이의 일종으로, 얼갈이김치로 보면 무난하다.
▷초마기 짐치: 보리 삶은 풀국을 이용해 담가 먹는 여름철 열무김치. 다른 지방 열무김치와 달리 국물이 많이 생기지 않게 담가 먹는다.보리밥과 잘 어울린다.
▷세우리 짐치: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많이 담가 먹던 부추김치. 절여서 담기도 하고 그냥 멜젓에만 버무려서 삭혀 먹기도 한다. 오래 익힌 세우리 김치는 그 특유의 맛이 절로 군침 돌게 한다.‘세우리’는 부추의 강정 기능을 직설적으로 옮긴 말이다.
▷수박껍질 짐치: 한 여름 수박껍질를 소금에 절인 후 양념에 버무려 담근 김치.은근한 단맛이 있어 아이들도 좋아했다. 재래종 수박 껍질이 두꺼웠기 때문에 이를 활용한 김치였다. 사실  그다지 많이 만들어 먹지는 않았다.
▷패마농 짐치: 겨울철 쪽파에 멜젓을 많이 넣고 푹 삭혀 먹는 김치다. 생선 지짐(조림)에도 간혹 이용했다.

강화 교동도 선장네: 800포기 김장…통짜 젓갈과 생새우 듬뿍

북한 땅(황해도 연안군)을 바로 건너다보는 강화 교동도는 2014년 7월 1일에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섬이었다. 육지와 연결된 지 4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섬 문화는 그대로다.
교동도에는 허가받은 어선이 모두 5척이다. 그중 새우잡이 배 대흥호(6.06t 연안자망)의 현상록(65) 선장 집은 지난해 11월 26일 직접 농사지은 배추 800포기 김장을 했다. 주문받은 물량도 있고, 부인이 운영하는 선창가 식당 ‘별해별식’에서 김치 소비가 많아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물게 많은 양의 김장을 한다.

강화 교동도 남산포의 새우잡이 배 대흥호 선장 현상록씨가 절인 배추 뿌리 부분을 손질하고 있다. 직접 농사지은 배추 800포기 김장을 했다.

강화 교동도 남산포의 새우잡이 배 대흥호 선장 현상록씨가 절인 배추 뿌리 부분을 손질하고 있다. 직접 농사지은 배추 800포기 김장을 했다.

서울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로 가서 교동도 들어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현장에 도착하니 오전 8시 15분이었다. 대흥호에서 잡은 새우∙밴댕이∙황석어 등으로 젓갈을 담그는 작업장에 김치 버무리는 임시 조리대를 만들고 12명이 이미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현 선장은 절인 배추 뿌리 부분을 마지막으로 손질해(‘꼭지를 딴다’고 했다) 조리대로 나르고, 부인 김순자(61)씨는 김칫소를 공급하며 현장 지원과 진행을 맡았다. 아들 지훈(41) 씨는 주문받은 김치 포장을 담당했다. 이 집 김장을 지켜보게 된 건 지난해 6월 24일 육젓 새우잡이를 취재하러 갔다가 맛보라고 내놓은 전년 김장 김치에 회를 싸 먹어보고 맛있어서 김장 때 꼭 연락을 달라고 부탁해 둔 덕분이다.
김장의 모든 재료는 직접 재배하거나 바다에서 잡아 온 것들이다. 지훈씨는 “김장은 1년 농사 마지막이다. 배추 뽑아 다듬고 절여서 건지고 비벼 통에 담기까지 꼬박 1주일이 걸린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재료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올해는 갑자기 추워져 배추가 얼까 봐 예년보다 며칠 앞서 뽑았다. 11월 19~22일 밭에서 뽑아 다듬고 야적했다가 23일 작업장으로 옮겨 소금물에 담그는 작업을 오후 1시까지 했다. 절인 배추를 25일 오전 5시부터 건져서 오후 2시까지 헹궈 물이 빠지게 쌓아 뒀다가 26일 오전 7시부터 비비기 시작했다.

김장 배추 800포기를 재배한 현상록 선장네 밭. 배추뿐 아니라 김장에 들어가는 모든 농산물을 직접 재배한다.

김장 배추 800포기를 재배한 현상록 선장네 밭. 배추뿐 아니라 김장에 들어가는 모든 농산물을 직접 재배한다.

농사는 집 근처 6645㎡(2010평) 밭에서 짓는다. 배추∙무, 부재료 채소, 고추까지 모두 재배한다. 그 재료로 동네 아주머니들 12명이 모여 함께 김장하니 옛 농경사회 김장 풍경과 분위기가 살아났다. 예전처럼 이웃끼리 돌아가며 품앗이로 돕는 풍습은 사라졌다고 한다. 이날 함께 일한 분들은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좀 넘어서 품삯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도 각자의 동네까지 차로 태워 보내줬다.
교동도는 김장을 11월 중순께 한다. 현 선장 집은 이웃이 다 끝나면 담근다. 그래야 동네 아주머니들 일손 빌리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대개 11월 마지막 주가 된다.

800포기 김장을 동네 아주머니 12명이 버무리는데 5시간 30분이 걸렸다. 김장 품앗이 풍속은 사라졌고 수고비를 받고 일을 돕는다고 한다. 현상록 선장은 양이 너무 많아 덜 버무려진 양념을 쇠스랑으로 틈틈이 젓는다.

800포기 김장을 동네 아주머니 12명이 버무리는데 5시간 30분이 걸렸다. 김장 품앗이 풍속은 사라졌고 수고비를 받고 일을 돕는다고 한다. 현상록 선장은 양이 너무 많아 덜 버무려진 양념을 쇠스랑으로 틈틈이 젓는다.

2017년 김장은 1000포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800포기만 했다. 전년에 담근 게 저온창고에 아직 남아있어서 약간 줄였다고 한다.
현 선장의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 출신이고, 부인 김씨는 서울에서 시집와 파주가 고향인 시어머니에게 김치를 배웠다. 시어머니는 바닷가에 살지만 해산물 재료를 많이 못 넣었다. 한 푼어치라도 돈 받고 팔려고 새우를 무척 아꼈다. 며느리는 새우 욕심이 있어서 많이 넣고 싶었다. 시어머니는 늘 “새우 조금만 넣어라”고 말렸다. 며느리는 한 말을 쏟아 넣고 “조금만 넣었어요”라고 거짓말을 했다. 김씨는 “그렇게 넣고 싶은 만큼 넣으니까 김치가 맛있어졌다”고 했다. 재료 욕심 덕분에 김씨는 ‘아무거나 버무려도 맛있다’는 평을 들을 만큼 음식 솜씨가 좋다.

김칫소를 넣고 양념을 고루 발라 겉잎을 여민 김치 한 포기(배추 절반). 통짜로 들어간 젓갈 생선 토막이 겉에 붙어있다.

김칫소를 넣고 양념을 고루 발라 겉잎을 여민 김치 한 포기(배추 절반). 통짜로 들어간 젓갈 생선 토막이 겉에 붙어있다.

배추를 절일 때는 두 쪽으로 가르고 뿌리 가운데 칼집을 내서 소금물에 담근다. 포기가 큰 배추는 비비면서 반을 다시 반으로 가른다. 절이는 소금물 염도를 낮게 해 24~30시간 절인다. 12시간 만에 절이려면 소금을 많이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맛이 없어 오래 절인다고 한다. 예전에는 바닷물에 절였다 하는데, 그때 절이는 방식과 비슷하게 낮은 염도에서 오래 절이는 게 아닌가 싶다.
배추 헹구기를 마치고 25일 오후 3시부터 무채를 썰기 시작해 오후 7시까지 양념을 버무렸다. 고춧가루(103.2㎏/강화도 기준 1관 4.3㎏짜리 24관)∙무채∙파에 다진 마늘∙생강, 간 양파∙배, 젓갈 3종과 생새우가 들어갔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안 들어간다. 설탕과 인공조미료는 일절 넣지 않는다. 너무 복잡하게 들어가면 맛이 없어진다고 했다. 젓갈은 밴댕이젓(32㎏), 황석어젓(20㎏), 새우젓(육젓/대두 2말 32㎏)을 모두 갈거나 달이지 않고 통으로 넣는다. 젓갈을 많이 넣기 때문에 소금 간은 무채를 절이는 정도로 살짝 넣는다.
생새우를 아주 많이 넣는 게 특징이다. 시원한 맛을 낸다고 한다. 800포기 김장에 120㎏(30㎏ 4상자)을 넣었다. 김장에 쓰는 새우를 이 마을 사람들은 ‘중아’라고 하는데 중하(中蝦)를 말하는 듯하다. 김장철이 아닐 때는 말려서 홍새우라는 이름으로 팔고, 김장철에는 생으로 판다. 지훈씨는 “우리 배로 잡은 거니까 아낌없이 넣는다”고 했다.
김장 비비기 전날 사람이 들어가 누울 만한 커다란 통 2개에 양념을 버무렸는데, 현 선장 부자가 몇 시간이나 애를 먹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버무리는 기계를 사든지 해야지…”라며 지훈씨가 말끝을 흐리자 어머니 김씨는 “아주 죽을 뻔했다. 악착같이 버무렸다”고 뒷말을 이었다.

어선 선장 집 김장이라 김칫소에 젓갈과 생 새우가 푸짐하게 들어갔다. 통으로 넣은 밴댕이젓갈과 미처 양념에 버무려지지 않은 생 새우가 보인다.

어선 선장 집 김장이라 김칫소에 젓갈과 생 새우가 푸짐하게 들어갔다. 통으로 넣은 밴댕이젓갈과 미처 양념에 버무려지지 않은 생 새우가 보인다.

양념 간은 심심한 편이다. 김씨는 “싱거운 듯하지만, 밴댕이젓∙황석어젓이 녹으면 간이 올라온다. 또 배추를 깊이 절여서 양념이 짜면 안 된다. 양념이 처음에는 짭짤했는데 생새우를 워낙 많이 넣어 싱거워졌다. 이게 맞는 간이다”고 설명했다. 양념을 비빔 작업대로 퍼 나를 때 보니 중간중간 채 비벼지지 않은 생새우가 허옇게 뭉쳐 있는 것이 자주 보였다. 배추∙무 빼고 부재료 값을 시세로 계산하면 300만원쯤 들어간 것으로 추산했다.

현 선장의 부인 김순자씨(왼쪽)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김치를 버무리고 있다.

현 선장의 부인 김순자씨(왼쪽)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김치를 버무리고 있다.

김치 비비기는 공장에서 쓰는 화물 받침대를 2단으로 길게 쌓고 비닐로 덮은 다음 절인 배추를 가운데 두고 양념을 양쪽 가장자리에 나눠 놓고 사람이 마주 앉아 작업했다. 김칫소를 넣는 양이나 양념을 비비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랐다. 배추 포기도 농사지은 거라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평소 배에서 잡아온 생선을 가공하는 작업장에서 배추를 절이고 다듬어 양념에 비비고 통에 담았다. 현 선장의 아들 지훈씨가 주문 받은 물량을 10㎏ 상자에 포장하고 있다.

평소 배에서 잡아온 생선을 가공하는 작업장에서 배추를 절이고 다듬어 양념에 비비고 통에 담았다. 현 선장의 아들 지훈씨가 주문 받은 물량을 10㎏ 상자에 포장하고 있다.

완성한 김치를 두 겹 비닐봉지에 넣어 10㎏ 포장 상자에 담았다.

완성한 김치를 두 겹 비닐봉지에 넣어 10㎏ 포장 상자에 담았다.

김치를 버무리는 동안 지훈씨와 남자 한 명은 스티로폼 박스에 비닐봉지를 넣고 김치를 포장했다. 10㎏을 10만원에 판매하지만 실제는 12㎏에 맞춰 담았다. 택배로 발송하거나 주문한 사람이 와서 가지고 간다고 한다. 이날까지 50상자를 예약받았지만 주문이 더 있을 거라며 103상자를 포장했다.
담그기를 마친 김치는 비닐봉지에 담고 주둥이를 묶어 상온에 며칠 두면 비닐이 부풀어 오른다. 보통은 5일 안팎, 좀 추우면 일주일 지나면 비닐봉지가 풍선처럼 빵빵해진다고 한다. 그때 김치냉장고 온도 낮은 칸에 두면 김치가 맛있게 보관된다고 알려줬다.

현 선장의 아들 지훈씨가 비닐봉지에 김치를 담아 새우젓 담그는 드럼통에 쟁이고 있다. 상온에서 5~7일 동안 1차 발효한 다음 저온창고에 저장한다.

현 선장의 아들 지훈씨가 비닐봉지에 김치를 담아 새우젓 담그는 드럼통에 쟁이고 있다. 상온에서 5~7일 동안 1차 발효한 다음 저온창고에 저장한다.

현 선장네는 김장독을 땅에 묻는 대신 젓갈 담그는 드럼통에 넣어 대형 저온창고에 보관한다. 드럼통 전체에 큰 비닐봉지를 넣고 그 안에 김치 담은 작은 봉투 네 개를 넣는다. 작은 봉투는 두 장을 겹치되 주둥이는 따로 묶는다. 드럼통 하나에 네 봉투로 나눠 저장하는 건 개봉해 먹을 때 공기 접촉시간을 줄여 김치의 신선도를 오래 유지하는 방법으로 보이는데, 물어보니 꺼내 먹을 때 편리해서 그런다고 했다. 김치가 발효되면서 가스가 올라오면 열도 나므로 저온창고 온도는 영하 3~4도로 맞춘다고 한다.

김장 일을 한 사람들을 위한 점심상. 김장 겉절이를 들기름 두르고 지지다가 물을 붓고 배추 줄기가 푹 무르도록 끓인 속대국(오른쪽 냄비)을 한술 뜬 마을 남성은 ’김장 날은 이게 최고지“라며 반겼다.

김장 일을 한 사람들을 위한 점심상. 김장 겉절이를 들기름 두르고 지지다가 물을 붓고 배추 줄기가 푹 무르도록 끓인 속대국(오른쪽 냄비)을 한술 뜬 마을 남성은 ’김장 날은 이게 최고지“라며 반겼다.

낮 12시 45분 김장 작업은 마무리됐다. 이어진 점심상에는 김칫소, 삶은 돼지고기, 굴, 새우젓 무침을 곁들인 배추속대 쌈, 총각김치∙물김치∙양념간장과 배춧속대국이 올라왔다. 속대국은 김장 겉절이를 들기름 두르고 지지다가 물을 붓고 배추 줄기가 흐물거리도록 끓였는데 국물이 달금하고 시원해 맛이 좋았다. 김장 일을 거든 마을 남성은 “김장 날은 이게 최고지”라며 반겼다.
일한 아주머니들은 식사하고 품삯을 받아 남은 김칫소를 한 봉지씩 얻어 들고 돌아갔다. 예전 어렵게 살던 시절에는 이 집 김칫소에 해물이 많이 들어가니까 남겨서 얻어가려고 일부러 양념을 조금씩 바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김장에 앞서 순무김치와 총각김치는 지난주에 담갔다. 양념 한번 만들어 이 김치 저 김치 한 번에 담그면 맛이 없기 때문에 따로 담근다. 동치미는 다음 주인 12월 초에 조금만 담근다.
김장철에 무청과 순무청을 소금에 절여 대용량 비닐봉지에 담아 드럼통에 저장해두기도 했다. 대흥호가 잡아 온 생선을 회나 탕으로 만들어 손님을 맞는 식당 ‘별해별식’의 주방 책임자인 김씨는 “조금씩 덜어 20분쯤 삶아 소금기 빠지도록 찬물에 우려서 들기름으로 볶아주면 손님들이 고기보다 더 좋아한다”고 자랑했다.
식당은 관광객∙낚시꾼이나 말린 새우, 젓갈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김치를 얻어먹어 보고는 맛있다고, 팔라고, 음식점 하라고 말들을 많이 해서 2001년부터 겸업으로 하고 있다. 새우젓 사러 왔던 손님이 김치 맛을 보고는 새우젓 말고 김치를 사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지훈씨가 말했다.
“눈 내릴 때 뱃일 안 나가고 지난해 김장김치에 돼지고기 넣고 찌개 끓이면 그야말로 깊은 맛이 납니다. 그 김치에 냉동해둔 초여름 밴댕이나 겨울 모치(숭어 새끼) 회 싸 먹어도 쓰러집니다. 죽여줍니다.”
 글∙사진=이택희(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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