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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1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체육계 성폭력 대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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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조재범 전 코치 성폭행 파문 관련 브리핑을 갖고 체육계 성폭력 비위 근절을 위한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조재범 전 코치 성폭행 파문 관련 브리핑을 갖고 체육계 성폭력 비위 근절을 위한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2016년,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지도자 준비를 하던 김은희(28)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생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A 코치를 대회장에서 만난 것이다. 당시 그는 다른 선수를 성추행해 면직됐으나 시간이 흐른 뒤 버젓이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성폭력 후유증으로 괴로웠던 김은희 씨는 2016년 A 코치를 고소했다. 2017년 10월, 법원은 1심에서 A 코치에게 징역 10년과 12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했다. 이후 김씨는 힘을 내어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공개했고, 블로그를 열어 비슷한 처지의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해 3월엔 리듬체조 이경희 코치가 간부 B씨가 2011년부터 3년간 자신에게 성폭력을 가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 코치는 2014년 탄원서를 제출했고, 가해자는 면직됐다. 그러나 B씨는 몇 년 뒤 다시 임원으로 돌아오려는 시도를 하다 대한체육회 심의위원회 인준을 받지 못했다. B씨는 체육회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이 코치와 자신이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가해자가 되려 피해자를 공격한 것이다. 이 코치는 이에 분노해 직접 방송에 나와 이 사실을 공개했다.

두 여성 체육인이 용기있는 목소리를 낸 지 1년 가량이 지난 2019년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는 폭행 혐의로 수감중인 조재범 전 코치를 성폭행 혐의로 추가 고소했다. 폭행 뿐 아니라 17살 때부터 4년간 지속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다. 조 코치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다.

체육계에서 폭력 및 성폭력이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건 폐쇄적이고 상하수직적인 '갑을관계' 때문이다. 선수는 지도자의 지시를 따라야만 한다. 지도자가 경기 출전 및 진학, 성적과 관련해 절대 권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을'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더 조심스럽고, 세심한 대처가 필요하다.

조재범 코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심석희를 지도했다. 폭력은 그때부터 자행됐다. 심석희 측 관계자는 "혼자서 끙끙 앓았을 것이다. 체육회나 연맹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김은희씨는 "심석희 선수가 성폭력 사실을 공개한 건 보고 마음이 아팠다. 나도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선수 생활을 더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앞으로가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미투' 열기가 뜨거웠던 지난해 체육계 여성 관련 단체 및 부서들은 체육계 성폭력 근절 대책과 법 제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스포츠계의 반응은 조용했다. 1년 동안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밝힌 인물은 없었다. 이경희 코치처럼 사실을 밝힌 뒤 2차 피해를 입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와 종목 단체 등의 태도도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한 체육계 여성 인사는 "사건이 발생하면 종목단체에선 덮기 급급하다. 가해자 뿐 아니라 단체에 대한 엄벌을 내려야 한다. 지도자들에 대한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빙상경기연맹도 심석희의 폭행 사실에 대해서는 인지했으나 이를 숨긴 바 있다.

정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도 있다. 김은희 씨는 "미투운동을 진행하는 한 여성체육단체를 찾아갔지만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합의 얘기를 꺼냈다는 이유로 모멸적인 표현까지 들었다.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났다"고 했다. 김 씨의 싸움은 외로웠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인권센터, 대한테니스협회 등에도 수차례 신고했지만 큰 도움을 얻지 못했다. 성폭력 피해여성을 돕는 한국여성의전화와 몇몇 사람이 도움을 줘 법정싸움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9일 조재범 코치 성폭력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열고 대책을 발표했다. ^가해자에 대한 영구제명 확대 ^민간주도 성폭력 사례 전수조사 ^체육단체 전담팀과 기구 구성 ^선수촌 합숙훈련 개선 등이다. 요컨대 선수들이 좀 더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는 자정의 기회를 한 차례 놓쳤다. "또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공개했다"는 심석희의 말을 귀담아 듣고 두 번째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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