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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서 떠오른 어린시절, 나무처럼 모여살던 친척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순의 시골 반 도시 반(1) 

삼십 대 초반부터 책을 만들기 시작해 편집자 생활 30여 년이 되어갈 무렵 막연히 시골로 가고 싶다는 몸과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붓고 있던 생명보험을 해약해 경기도 양평 골짜기에 땅을 사 아틀리에를 짓고 시골 반, 도시 반 생활을 시작했다. 문을 나서면서부터 지출을 해야 하는 도시생활과 돼지고기 1근이면 푸성귀를 뜯어 풍요로운 며칠을 지낼 수 있는 시골 생활을 소개한다. 책을 만들면서 이데아와 관념이 커진 머리와 한없이 굼떠진 몸이 부딪히는 시골 생활, 활자로 구축된 세상과 이름 모르는 꽃이 깨우쳐주는 우주의 울림을 통해 삶을 통찰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집 전면에 유리창이 끼워지자 굴참나무 숲이 유리창 전면에 비춰들었다. [사진 한순]

집 전면에 유리창이 끼워지자 굴참나무 숲이 유리창 전면에 비춰들었다. [사진 한순]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는 나의 깊은 속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아이들 학교 문제, 회사 일 때문에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강원도 미천골 깊은 숲속 펜션에서 하루 이틀 묵는 정도로 마음을 달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둘째 아이의 대학 입시가 끝나자 시골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남편과 나는 생명보험을 해약했다. 그리고 나무가 사는 땅을 샀다. 그러나 땅만 사놓았을 뿐 지을 형편이 되지 않아, 차를 타고 달려가 집에서 싸간 커피를 종이컵에 따라 마시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서울로 돌아오곤 했다.

양평 산속에 초저예산으로 새로 집 지어

그런 세월을 보내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건축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초저예산으로 산속에 집을 지어보기로 했다. 나는 건축가에게 가능한 나무를 베지 않고 집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은 건축가는 학생들과 답사차 현장에 나와 나무의 위치와 배치도를 그렸다. 장비가 드나들기 쉬워야 건축이 수월했을 텐데, 나무를 살리며 집을 짓느라 도면에서 데크의 한 부분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방의 크기가 줄기도 했다.

굴참나무 숲에서 가능한 나무를 살리며 집을 지으려 건축가에게도 &#39;나무&#39; 현장 소장에게도 &#39;나무&#39;를 외쳤다.

굴참나무 숲에서 가능한 나무를 살리며 집을 지으려 건축가에게도 &#39;나무&#39; 현장 소장에게도 &#39;나무&#39;를 외쳤다.

건축가에게도 나무, 현장 소장에게도 나무, 나무 나무를 외치며 건축을 하다가 드디어 집의 정면 창에 유리가 끼워졌다고 해서 현장을 방문하게 됐다. 나무의 푸르름이 가장 아름다운 5월 초였다. 이쪽저쪽을 체크하다가 유리의 정면과 마주하는 순간 강한 충격이 다가왔다.

커다란 유리에는 앞 숲의 연둣빛 나무들이 두세 겹으로 반사되며 나의 배경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 장면은 어떤 기억을 정면으로 떠오르게 했다. 그것은 나의 무의식 깊이 저장된 어떤 장면이었다.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은, 그렇다고 그리 불행하지도 않은, 슬프며 애잔하고 배 속 끝까지 닿는 어떤 느낌이었다.

그날 나는 건축가에게 “집 잘 지으셨네요. 잘 잡아내셨어요”라고 가감 없이 말했다. 현장 스태프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 나는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아까 낮에 받았던 연둣빛 나무의 반사된 느낌이 너무 강해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의 마음은 송두리째 휘청였다. 몸도 따라 휘청였다. 무엇이 나의 기억 속에 그다지도 강하게 자리 잡았는지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입을 다물고 그날의 느낌을 따라 지난날 지나온 길을 찬찬히 되짚어갔다.

나의 고향 충북 청주 모충동에는 외사촌들이 모여 살았다. 큰외삼촌네, 작은이모네, 작은외삼촌네, 우리 집, 작은이모의 작은집 등 몇 집 건너면 친척이 살 정도로 붙어살았다. 그 동네 가장 어른은 우리 외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어느 집에서 저녁 식사가 끝나면 손주나 손녀 두 명이 할머니의 양쪽 팔을 부축해 큰외삼촌댁에 모셔다드리면 일과가 끝나곤 했다.

우리 외사촌들은 마구 뛰놀다가 어느 집이든 들어가 밥을 먹었다. 맨밥을 고추장에 비벼 인원수대로 숟가락을 꽂아 밥을 퍼먹었다. 추운 겨울에는 이불 한 장에 발을 덮고 동그랗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방귀라도 뀌면 이불을 풀썩이며 냄새난다고 난리들을 피우곤 했다.

겨울을 지켜주는 땔감.

겨울을 지켜주는 땔감.

말이 없고 순하던 사촌 택균 오빠는 대학에 들어가더니 세로로 인쇄된 『쇼펜하우어』와 『마음의 샘터』라는 책을 자꾸 읽었다. 그러다가 점점 말이 없어지고, 급기야 마음의 병이 나고 말았다. 어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모여 앉아 “택균이가 그 아가씨를 너무 좋아했댜”, “병원을 저렇게 가지 않으려 하니 걱정이여” 하며 우리가 듣지 않을까 쉬쉬했다.

사촌들은 우리 아버지를 잘 따랐고, 결국 택균 오빠를 입원시키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 되었다. 아버지는 택균 오빠를 달래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택균이를 두고 돌아서는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억지로 걸어왔다며 애달픈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자꾸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택균 오빠가 보던 책을 집으로 가져와 머리맡 서랍 속에 간직했다.

우리 사촌들은 마음속에 택균이 오빠에 대한 똑같은 상실과 상처를 간직하고 또 뛰어놀았다. 마을 안에 있는 큰 묘지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장마가 지면 고기를 잡으러 무심천으로 나갔다가 어른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족히 스무 명이 넘는 사촌들은 시간이 흐르자 군대에 가고 서울로 돈을 벌러 가기도 했다.

나의 서열은 끝에서 두 번째쯤 되는 것 같다. 동네의 어떤 아이도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내 위에는 벌떼 같은 오빠 십여 명이 도열해 있었으니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됐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턱짓으로 가리키면 됐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촌들은 늘 걱정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 집 저 집에서 들고 오는 걱정들은 우리 친척들의 공동 숙제가 됐고 모두 모여 지혜를 모았다. 그 맨 위에는 우리 외할머니의 넓은 치마 품이 있었다.

겨울 나무 그림자.

겨울 나무 그림자.

기억이 여기까지 이르자 한장의 흑백사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충동 우리 집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집 입구에 식구들이 조르르 서 있는데 마치 숲속 입구 같은 느낌이다. 어려서 이 사진을 보았을 때는 집 주변에 둘러싸여 있던 나무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마치 숲속 같다.

결혼한 지 33년이 넘었다. 내가 친정에 간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우리 시댁은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모충동에서 뛰어놀던 시절처럼 나는 모든 일을 정면으로 맞았다. 그리고 친정은 꽤 많이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골에 지은 내 집과의 대면에서 나는 원형의 내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시댁에 잘 적응했고, 지난날은 그냥 지난 줄 알았다. 생명보험을 해약해 나무가 있는 땅을 사 나무, 나무를 외치며 집을 지은 것은 이래저래 눌러놓은 나의 원형이 시킨 짓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운 것이 어디 나무뿐이랴. 한 사람의 걱정이 모두의 걱정이 되고, 걱정을 안고도 모여 뛰어놀던 인정이 살아 있는 사람 사는 동네가 그리웠다. 나무처럼 모여 웬만한 일은 숲으로 덮고 지나던 그 시절이 다시 기다려진다.

고령사회 대안 될 어린 시절 모충동 모계 사회

사회도 국가도 더는 고령 인구를 감당키 어려워졌다. 나이 든 어른은 자식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나이 들어서도 열심히 돈을 모은다. 그래서 요양원에 갈 거란다. 이런 말 뒤에는 인생에 대한 씁쓸한 표정이 뒤따른다.

요즘 유럽 사회학자들이 내놓는 고령사회 대안은 우리 모충동 모계 사회를 연상케 한다. 두세 집에서 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혼자 책임지는 일보다 훨씬 가볍다. 지나치게 즐겁거나 엄청나게 슬픈 감정보다는 애잔한 휴머니즘이 스미는 마을을 생각해 본다. 끄덕끄덕 고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는 시골 생활을 꿈꾸어 본다. 시골 신입생의 묵상이 끝나 새 앉은 자리를 찾아보니 빈 가지가 하늘에 얇게 떨리고 있다.

한순 시인·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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