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철호 칼럼

어이없는 청와대 행정관과 이해못할 육참총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청와대의 34살 정 모 행정관이 김용우 육군참모총장을 토요일 오전 카페로 불러낸 사건은 오래전의 비슷한 기억을 소환했다. 다음은 진보 쪽 군사 전문가인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이 쓴 『시크릿 파일-위기의 장군들』에 나오는 내용이다.

2004년 노무현 청와대는 달랐다 #육참총장 반발 비서실장이 진화 #군 명예 지켜주는 미 대통령 #명예훈장 병사에 먼저 경례해 #청와대는 왜 군 명예 흔드는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4년 10월 13일, 군 장성 인사를 코앞에 둔 시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강호식 행정관이 윤광웅 국방부 장관을 찾아왔다. 그는 “육군이 올린 장군 진급 대상자의 3분의 1 이상이 부적격자이니 진급 심사를 다시 해야 한다”며 “대통령의 지시”라고 말했다. 때마침 전해철 민정비서관도 윤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와 “육군 장군 진급자의 영호남 비율을 엇비슷하게 맞춰야 한다”고 했다.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윤 장관은 곧바로 차관과 차관보를 통해 이런 내용을 남재준 육참총장에게 전달했다. 여기까지는 이번 사건과 닮은꼴이다.

사태 전개 과정은 그다음부터 완전히 다르다. 김용우 총장은 정 행정관을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정 행정관이 육군 인사 선발 절차에 관해 설명을 듣고 싶다며 먼저 만남을 요청했다”는 해명만 내놓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야당은 “행정관이 부른다고 50만 육군을 통솔하는 육참총장이 휴일 오전에 카페로 쪼르르 달려가냐”며 혀를 찬다. 이에 비해 15년 전 남재준 육참총장은 “군 인사법상 재심은 곤란하다”며 청와대의 인사개입에 맞섰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예비역 장군은 이렇게 전했다. “남 총장은 ‘진급 명단을 바꾸려면 나부터 바꾸라’ ‘청와대가 미는 인사를 승진시키되 그 명단을 군 내부 인트라넷에 공개하겠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무엇보다 대조적인 것은 청와대의 대응이다. 그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지침을 받아 일하는 행정관이 육참총장을 못 만날 일도 아니다”고 해 더 큰 후폭풍을 자초했다. 참고로 정 행정관은 별정직 5급이고 ‘군 의전예우 지침’에 따르면 육참총장은 장관급이다. 반면, 노무현 청와대의 대응은 완전 딴판이었다. 육본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접한 청와대 국정상황실(당시 실장 박남춘)은 민정수석실이 장군 진급에 압력을 행사한 사실을 파악하고 경악했다. 민정수석실은 검증 기능만 있지 장군 진급 심사를 좌우할 어떤 권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국정상황실은 곧바로 김우식 비서실장과 윤 국방장관의 전화 통화를 주선했다. 연세대 총장 출신으로 합리적 성품의 김 비서실장이 직접 “대통령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 없다”고 확인해 주면서 파문은 가라앉았다.

이철호 칼럼 1/9

이철호 칼럼 1/9

물론 민정수석실의 뒤끝은 장난이 아니었다. 군 인사에 불만을 품은 투서들을 군 검찰에 넘겨 사상 처음 육참총장 집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두 달 넘게 육군본부를 탈탈 털었다. 그때 군 검찰이던 최강욱 법무관이 지금의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다. 하지만 평소 “별 달고 거들먹거린다”며 장군들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노 대통령도 군에 대한 마지막 예의는 잊지 않았다. 남 총장이 추천한 장군 진급자 명단을 그대로 결재했다. 또 남 총장이 압수수색에 항의해 사표를 던지자 1시간 만에 바로 반려했다. 남 총장은 임기 2년을 모두 채우고 무사히 전역했다.

역대 청와대는 군의 명예와 위계질서를 나름대로 존중해 주었다. 행정관을 보내 함부로 장관이나 총장을 대하지 않았다. 실무자 선을 접촉하는 게 예의였다. 군 수뇌부는 인사를 앞두고 인사복지실장(예비역 소장이나 중장) 같은 참모를 청와대에 보내 물밑에서 의견 조율을 하곤 했다. 이번 사건은 돌출적으로 이런 전통을 깼다. 국민의 눈에는 육참총장을 카페로 불러낸 어이없는 행정관, 그런다고 쪼르르 달려나간 이해못할 육참총장, 청와대 대변인의 ‘그게 왜 문제냐’는 발언은 정권의 오만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전방에서 강추위 속에 묵묵히 복무하는 군 장병들은 얼마나 모멸감을 느끼겠는가.

미국에는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있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동료를 구한 장병에게 수여하는 최고등급 훈장이다. 피 튀기는 최전선에서 공훈을 세워야 하는 만큼 대부분 부사관이나 사병이 주인공이다. 훈장 수여식은 CNN 등 주요 방송이 반드시 생중계한다. 또 이 훈장을 받으면 특수한 차량번호판이 나와 신호 위반을 해도 교통경찰이 범칙금을 안 물린다. 수훈자가 비행기나 선박을 타면 그의 이름이 호명되고 “영웅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라는 방송이 나온다. 무엇보다 아무리 사병이라도 이 훈장을 받으면 4성 장군은 물론 군 통수권자인 미 대통령까지 먼저 경례를 하는 게 불문율이다. 백악관은 이렇게 군의 위상을 존중해주는 반면 청와대는 얼마 남지 않은 군의 명예마저 허물어 뜨리고 있다. 오늘따라 대한민국이 참 부끄럽고 한심해 보인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