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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신재민의 진실은 살아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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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히틀러와 스탈린 시대를 경험한 조지 오웰(1903~50)의 소설 『1984년』은 전체주의에 관한 완벽한 설명서 중의 하나다. 1984년의 세상은 끊임없는 전쟁 위기 조성, 고발과 처형의 공포 정치를 체제 유지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북한 정권과 비슷하다. 하지만 조지 오웰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권력이 대중에게 자행하는 언어와 기억의 조작 문제였다. 예를 들어 정부 부처인 진리부(ministry of truth)는 명칭과 정반대로 과거 사실을 삭제하거나 창조하는 거짓말 생산소다.

언어와 기억의 조작술로 덮지 못해 #청와대 비서 국채발행 개입은 위법

전 국민을 24시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일방향 방송통신 미디어는 자유를 예속이라 부르고 무지를 힘이라고 세뇌시킨다. 주인공은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는 당 중앙의 기억 조작에 저항하다 마침내 ‘내 기억이 잘 못 됐나. 둘 더하기 둘은 넷이 아닐지 몰라’라는 의심 속에 빠진다. 주인공의 사실 인식은 언어와 기억 조작에 의해 자기 의심을 거쳐 정권의 거짓말을 수용하는 단계로 진전된다. 1984년의 전체주의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신재민의 ‘청와대 권력 일탈 폭로’ 이후 당·정·청 집권 기구는 그가 겪은 과거의 사실들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임을 증명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는 모양새다. 기획재정부 전 사무관의 폭로 내용은 대중이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권이 고꾸라질 만큼 불온하고 파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재부는 청와대로 불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4년간 헌신적으로 일했던 막내 사무관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검찰이 이런저런 죄목을 뒤집어씌워 신재민을 침묵의 공간으로 보내주길 바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렇지 않으면 추가 폭로로 여러 사람이 다칠 수 있는 데다 제2, 제3의 신재민마저 등장할 수 있는 까닭이다.

민주당의 어떤 사람은 신재민의 입을 막고 싶었는지 “퇴직 후 헛소문을 퍼뜨리는 양아치” “나쁜 머리 쓰며 의인인 척 위장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떠드는 솜씨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같은 언어폭력을 가했다. 이튿날 그가 정신적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목숨까지 내놓으려 했으니 이게 민주당 사람이 원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이쯤 되면 집권층 가운데 신재민의 입에서 자기 기억을 의심하는 언급이 나오고 청와대의 일탈은 없었다는 반성문이 나오길 기대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2019년 한국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아니다. 언어와 기억의 조작술이 신재민의 진실을 완전히 덮을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런 시대를 허용할 만큼 한국인의 헌법수호 의지와 민주 역량이 훼손되지 않았다. 우선 신재민이 자유로운 정신 상태에서 제작한 ‘12분 32초’ ‘6분 7초’ 짜리 유튜브 동영상 두 개가 진실의 증거물로 살아 있다. 여기엔 청와대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세수가 충분한데도 나랏빚을 더 내기로 자기들끼리 의사결정을 한 뒤 기재부를 압박해 이를 관철하려 했던 위법적 상황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기재부의 반대로 국채 발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최종 결과가 청와대의 위법성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국회 국정조사든 특검이든 장이 열리면 신재민의 유튜브를 근거로 관련자들을 대질 심문시켜 객관적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헌법과 정부조직법은 모든 국법 행위는 국무위원 즉, 정부 부처만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들의 정책 결정과 부처에 대한 지시는 위법이다. 김의겸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31일 ‘청와대가 국채발행에 개입할 권한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권한이 있다”고 발언했는데 ‘대통령 비서실’은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할 뿐 어떤 법적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사실을 망각한 얘기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