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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최고권력자 눈·귀를 가린 죄···청나라 아편전쟁 치욕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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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이 한창이던 1841년 5월 23일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은 자축의 분위기로 물들었습니다. 전장(戰場)인 광저우에서 들려온 승전보 때문입니다. 영국군 토벌을 지휘하던 정역장군(靖逆將軍) 혁산(奕山)은 공적을 인정받아 백옥의 모자 장식을 하사받았고, 그 외 554명에 달하는 공신이 공적을 인정받아 승진하거나 중앙으로 천거됐습니다. 이는 당시 광저우 지역 관리 전체와 맞먹는 숫자였습니다. ‘주제를 모르고 달려든 남만(南蠻) 오랑캐’를 보기 좋게 격파한 도광제는 천조(天祖)의 위엄을 지킨 것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청나라의 한 가정에서 아편을 흡입하는 모습 [중앙포토]

청나라의 한 가정에서 아편을 흡입하는 모습 [중앙포토]

하지만 이것이 한 편의 연극 같은 블랙코미디였다는 것은 두어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드러납니다.
사실 도광제가 자금성 안에서 승전보를 읽으며 기뻐하던 순간에도 혁산이 지키고 있던 광저우성은 영국군(해군 11척, 육군 2300명, 해군 1000명)에 의해 완벽하게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1841년 중국 광저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최고 권력자부터 정부 관료까지 모두가 눈과 귀를 가린 채 각본처럼 움직였던 역사적 사기극의 전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불필요한 우려를 과장한다" 

1841년 초 아편전쟁 초기 영국군과 담판에 나선 것은 직예총독 기선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초 오랑캐에 대한 강경 토벌을 주장했던 그는 막상 영국군의 화력을 목도한 뒤로는 주전론자에서 주화론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불법몰수한 아편 배상금 600만냥, 청나라의 핵심 항구 5곳 개항, 홍콩 할양 등을 포함한 영국 측 조건을 대거 수용한 '천비가조약(川鼻假條約)' 체결을 추진했습니다.

반면 영국군의 무력을 직접 본 적이 없던 도광제는 군사적으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걱정은 청나라의 무력이 약한 게 아니라 영국군과 담판을 지어야 할 기선이 겁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기선이 영국 측 청구서를 가져오자 도광제는 노발대발했고, 재산(4000만냥)을 몰수한뒤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는 엄벌에 처했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 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난징조약을 체결하는 그림 [중앙포토]

제1차 아편전쟁 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난징조약을 체결하는 그림 [중앙포토]

그러면서 이렇게 엄포했습니다. “기선이 영국군에게 협박을 당해 광동성의 정황에 대해 경솔하게 상주해 보고하기를 지리적 이점으로는 수비할 수 없고 무기는 예리함에 의지할 수 없고 병력은 취약하고 민간의 사정은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했다.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고 과장해 조정을 압박했다. 이처럼 은혜를 배신하고 나라를 망치는 것으로 양심을 깡그리 저버린 것이다.”

기선의 비참한 결말은 후임자들에게 '가이드 라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는 너무도 명확했습니다. 기선이 해임된 후 청나라를 대표하는 명장들이 잇달아 광저우 전선에 투입됐지만, 앞으로 이들은 똑같은 단계를 밟아나가게 됩니다.
①서양 오랑캐 강력 토벌 호언장담 ②영국군과 교전 및 패배 ③전쟁 회피 및 허위 보고

청나라 명장들의 사기극 대잔치

1841년 3월 15일 광저우 구원투수로 긴급 호출된 참찬대신(參贊大臣) 양방은 청나라를 대표하는 백전노장이었습니다. 15세에 입대해 55차례나 종군한 그는 백련교도의 난 등 중국 각지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해 종1품 관직에 과용후(果勇候)의 작위를 얻고, 자금성 안에서 말을 타는 것을 허락받는 등 큰 신임을 받은 장군이었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1839~42)이 한창이던 1841년 1월 7일, 동인도회사가 만든 철제 증기선 네메시스호(그림 오른쪽)가 청나라 범선 15척을 궤멸시키고 있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 패해 홍콩 할양 등을 골자로 하는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사진 글항아리]

제1차 아편전쟁(1839~42)이 한창이던 1841년 1월 7일, 동인도회사가 만든 철제 증기선 네메시스호(그림 오른쪽)가 청나라 범선 15척을 궤멸시키고 있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 패해 홍콩 할양 등을 골자로 하는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사진 글항아리]

부임 도중 도광제에게 "오랑캐에게 천조의 공포를 안겨주고 도리를 깨닫게 해주겠다"던 그는 사흘간 군선 수 십척이 침몰당하고 400여문의 대포를 빼앗기는 것을 목격한 뒤엔 멘탈이 완벽하게 붕괴됐습니다.
그간 믿고 있던 '육도삼략'의 병법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는 "영국의 승리는 사교의 술법자가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며 사교의 법술에 대항한답시고 부녀자의 소변을 모으는가 하면 “서양 오랑캐를 잡으려면 호랑이 날(日)과 시(時)에 태어난 장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묘책'이 통할 리는 없었죠.
급기야 3월 20일에는 영국군의 압박에 밀려 광저우에서 영국 상인들의 통상을 재개했는데, 이는 '통상을 허락하지 말라'는 도광제의 엄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영화 '아편전쟁'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아편전쟁'의 한 장면 [중앙포토]

그러니 살아남으려면 기만과 거짓보고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영국군에 대패하고 포대를 빼앗기자 ‘영국군이 성 밖 십 여리 지점에서 순찰할 뿐’이라고 보고했고, 영국군의 소형 군선 한 척을 경고 발포해 물러가게 했을 땐 ‘영국군 삼판선 두 대를 침몰시키고 함대의 돛대 하나를 부러뜨렸으며 영국군 다수를 사살했다’고 부풀렸습니다.
그러면서 '적이 겁을 먹고 뉘우치고 있으니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통상을 허가해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식으로 자신이 이미 몰래 허가한 무역 재개를 용인받으려고 애썼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점점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

하지만 양방의 거짓 보고에 고무된 도광제는 더 기세가 등등해졌습니다. “그렇게 쉽게 통상을 허가해줄 것 같으면 무엇하러 이런 대병력을 투입했겠냐. 과거 기선 처럼 딴 마음을 품지 말라”고 일축한 황제는 위내대신 겸 어전대신이던 혁산을 정역장군에 임명해 "오랑캐들이 행여나 도망칠 수 있으니 완벽하게 섬멸하라"는 명령도 내렸습니다.

물론 혁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연전연패 끝에 5월 26일 광저우성에서 백기를 내건 혁산은 “청나라의 모든 군대를 광저우 밖 200리 이상 물러나고 일주일 이내에 600만냥을 바친다”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자비를 털어 영국군이 내건 조건 날짜보다 이틀이나 빨리 납부했습니다.
그리고는 도광제에게는 ‘관군이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영국 기선을 격추해 침몰시키고 함대를 불태웠다’며 600만냥을 바쳐 성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완벽하게 숨겼습니다. 그가 벌인 거짓 보고의 하이라이트는 항복한 지 9일 후 또 다시 올린 6월 4일 상소인데, 쓴웃음을 감추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영화 '아편전쟁'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아편전쟁'의 한 장면 [중앙포토]

“성 밖의 서양 오랑캐 두목 몇몇이 손짓 발짓을 동원해 뭔가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통역관을 불러다 물어보니 긴히 간청드릴 일이 있어 대장군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감히 대청 제국의 대장군을 만나기를 청하느냐.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네놈들을 공격해 싹쓸이할 것이다.’ 이 말에 오랑캐 두목이 허겁지겁 모자를 벗고 좌우를 물리쳤으며 무기를 모두 땅에 내려놓은 뒤 성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습니다. 통역관이 ‘대청제국에 항거하고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들은 ‘유일한 생계수단인 무역이 금지되어 화물이 유통되지 않아 손실이 막대하고 손해액을 보상받을 길이 없어 막막합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다시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진심으로 사죄하고 있으며 부디 황제께서 너그러이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거래에서 손해 본 돈을 상환하고 통상을 허락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기극의 결말: 난징조약 

예상보다 길어지는 전쟁에 지쳐가던 도광제가 가장 바라는 것은 천자로서의 체면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혁산이 보낸 보고를 통해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오랑캐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받은 황제는 흡족했습니다. 앞서 양방의 거짓말은 과장 보고 수준이었다면 혁산의 거짓말은 사실관계를 뒤엎는 사기에 가까웠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영국상인들로부터 몰수한 아편을 불태워 아편전쟁을 촉발한 임칙서(가운데) [중앙포토]

영국상인들로부터 몰수한 아편을 불태워 아편전쟁을 촉발한 임칙서(가운데) [중앙포토]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1841년 8월 재개된 전투에서 영국군 1만 명은 광둥 지역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했고, 양쯔강으로 북상했습니다. 이듬해 3월에는 혁산이 이끄는 4만5000명의 군대가 영국군 1000명에게 대패해 3개월 뒤에는 상하이가, 7월에는 청나라 제2의 도시 난징을 지키는 핵심기지인 진강이 함락돼 결국 청나라는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었습니다. 1년 전 기선이 들고 온 조약서보다 불리한 조건이 담긴 조약이었습니다.

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② 광저우ㆍ상하이 등 5항(港)을 개항한다.
③ 개항장에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④ 전쟁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지불한다.
⑤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⑥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⑦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한다.

도광제는 왜 강경 토벌만 고집했을까

그렇다면 도광제는 왜 이렇게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을까요.
중국의 역사학자 마오하이젠 등에 따르면 현장 관료들이 영국 측 외교문서를 구미에 맞게 오역(誤譯)하는 관례가 크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도광제가 받아 든 파머스턴 영국 총리의 서한엔 “지금 청나라 관리가 이곳에 머무르는 본국(영국)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또 그 관리가 대영국의 위엄을 무시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영국왕은 육·해군 군사를 청나라 해역에 파견해 청 황제와 의논하여 누명을 벗고 억울함을 씻고자 한다.” 누가 봐도 황제의 은총과 혜안을 구하는 분위기가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아편전쟁 중 샤먼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샤먼을 점령하는 영국 육군 제18보병연대. [중앙포토]

아편전쟁 중 샤먼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샤먼을 점령하는 영국 육군 제18보병연대. [중앙포토]

그런데 여기서 ‘황제와 의논하여 누명을 벗고 억울함을 씻고자 한다’는 대목은 영어 원문에선 ‘demand from the Emperor satisfaction and redress’ 입니다. 직역하면 ‘황제에게 배상과 교정을 요구한다’가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자(天子)의 권위를 실추시킬 수 없었던 관료들은 이렇게 자의적 해석을 가하며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잃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편전쟁 초기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던 (하지만 모르고 있던) 도광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황제는 전 세계를 지배하며 국내외 모두 누구나 차별 없이 대한다. 그대 영국인들이 요구한 억울함을 씻는 것은 대황제가 이미 들어 알고 있으며 자세히 조사하여 그 죄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총사령관 조지 엘리엇 등은 모두 노를 돌려 남쪽으로 돌아가서 해결되는 것을 기다려라.”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3일 서울 성동구 성수 수제화 희망플렛폼을 방문해 수제화 거리를 돌아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3일 서울 성동구 성수 수제화 희망플렛폼을 방문해 수제화 거리를 돌아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진단에 대한 발언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소비는 지표상으로 좋게 나타났지만 계속 안 되는 것처럼 일관되게 보도됐다”(지난달 31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오찬) “(제조업이 살아나고 있으니)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말처럼 기회를 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지난해 11월 20일 청와대 국무회의)는 발언이 대표적입니다.
지난달 31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최저임금 인상으로 가계 실질소득이 높아졌다”고 말했지만, 하위 계층인 1~3분위의 소득이 감소하고 4ㆍ5분위의 소득은 늘어나 ‘분배 쇼크’라는 언론의 지적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께 일부 유리한 내용만 부각하고 민생경제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있다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옵니다.

200년 전 아편전쟁에서 정말 두려운 '아편'은 따로 있었습니다. 중국의 역사학자 이중텐 샤먼대 교수가 아편전쟁의 패배에 대해 정리한 글을 인용하며 맺겠습니다.
“아편전쟁 기간의 거짓말은 청나라 조정을 마비시켰던 지독한 ‘아편’이었다. 이들은 모두 즐거운 말이나 덕담 공치사나 아부성 발언만 듣고 싶어했다. 그들의 귀에 들려오는 정부는 대부분 사전에 선별 과정을 거친 왜곡된 것들이었다. 진실이 결여된 정보만 믿고 전쟁을 지휘하는 데 과연 승리할 수 있었을까.”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마오하이젠 『아편전쟁』, 이중텐 『제국의 슬픔』, 신윤길 『영국 동인도회사와 파머스턴의 砲艦政策(gunboat policy) : 아편전쟁기를 중심으로』, 이학로 『아편전쟁시기(1839~1842) 중국의 아편문제』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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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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