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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철 "靑 참모들 체력정년 있다, 1년 지나면 한계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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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20개월째 해외유랑 중인 문 대통령 최측근 양정철 

 세상에 별의별 권리가 다 있다. 잊혀질 권리?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이 2017년 5월 총총히 떠나면서 주장한 권리다. 사실 디지털 세계엔 존재한다. 인터넷 삭제를 요구할 권리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 지난해 1월 출간한 저서 '세상을 바꾸는 언어' 북콘서트 때 모습이다. 이때도 그는 해외유랑 중이었다.                     [메디치 미디어 제공]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 지난해 1월 출간한 저서 '세상을 바꾸는 언어' 북콘서트 때 모습이다. 이때도 그는 해외유랑 중이었다. [메디치 미디어 제공]

하지만 정치인에게 무슨…. 그가 해외를 떠돈지도 어느덧 20개월이니 "이제 그만하면 됐다. ‘양비’(양비서관의 줄임말, 여권 내 애칭)도 들어와 역할을 좀 할 때가 됐다"는 얘기들이 여권 내에서 오가고 있다. 설(2월5일)전 있을 예정이라는 청와대 인사 하마평에 그의 이름이 나오는 이유다.

[강민석 논설위원이 간다] #총선 출마 안 해 … 체질 아니다 #이런 참모도 있다는 선례로 족해 #조국·유시민은 정치하게 될 것 #사람 팔자 뜻대로만 되겠나 #해외유랑은 선거 때 도운 이들에 #부채 못 갚는다는 ‘파산신청’ #보은인사 대신 도피 택했다 #올해는 귀국해 시골 내려갈 것

마침 양 전 비서관이 서울 모처에서 지인들과 만나기로 했다는 얘기를 2일 들었다.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로 지내다 지난해 말 일시귀국한 그는 3일 도쿄로 떠난다고 했다.  출국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무작정 양 전 비서관이 지인들을 만나고 있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양 전 비서관과는 민주당출입기자 시절 안면을 튼 사이다.

내 얼굴을 보자  "아이고"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나. 이왕 왔으니 잠깐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했다. 일행에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옮겨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꼭 그렇게 해외 유랑을 다녀야 하나.

"나로서는 도피다 도피.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2번, 총선 2번, 당 대표 선거를 치르는 동안 내가 일(인물영입)을 많이 벌인 편이다. 문 대통령 도왔던 분들이 대가를 바란 건 아니어도 부채는 부채다. 부채를 다 갚다 보면 끝이 없다. 역대 정권이 하던 일(보은인사)을 반복해야 한다. 부채를 갚을 길이 없어 정치적으로 ‘파산신청’을 한 거다. 먹튀하는 수밖에 없잖나. 그래야 대통령이나 청와대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선거 도와준 분들은 내 욕을 많이 할 거다.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고. 하지만 그게 나의 조심하는 방식이고, 절박하게, 내가 사는 길이다."

문 대통령과 양 전 비서관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장면. 지난 2011년 문 대통령이 정계입문 하기전 북콘서트 출연자 대기실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                   [중앙포토]

문 대통령과 양 전 비서관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장면. 지난 2011년 문 대통령이 정계입문 하기전 북콘서트 출연자 대기실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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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내내 그렇게 유랑할 건가.

 "이제 ‘민폐 인프라’가 떨어졌다. 각국(뉴질랜드, 미국, 일본)에 가족이나 친척, 30년 넘은 가까운 지인들이 있어 동가식 서가숙하며 신세를 졌는데, 더 가면 눈치 보일 것 같다. 올해 게이오대 방문교수가 끝나면 귀국해서 시골에나 내려가 있을까 한다."

-그만하면 충분히 잊혀졌다.

“아니다. 솔직히 작년 추석 끝나고는 조금 한국에 있고 싶었는데, 국면마다 이름이 등장하잖나. 대통령 지지율이 높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임종석과의 갈등설’,  어려울때는 ‘복귀설’….”

-불화설이 나왔던 임종석 비서실장은 본 적 있나.

"한국 올 때면 편한 선후배(양정철 64년, 임종석 66년생)로 자주 만나 소주 한 잔씩 한다. 몸이 여기저기 많이 상했더라. 짠하다. 문재인 정부 첫 비서실장이란 큰 역할을 감당해줬다."

-요즘은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뜨겁다.

“공직을 안 하려던 분인데, 어려운 자리를 맡아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생은 이제 시작이다. 조 수석이나 유시민 이사장(노무현재단)은 세상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람 팔자 어디 뜻대로만 되겠나.”

-정치를 하게 될 거란 얘긴가.

“그렇게 되겠지? ”

-본인들은 안 한다는데 왜 그렇게 보나.

“물론 안 하려고 버틸 거다. 유시민과 조국, 두 분은 안 하려는 마음이 굉장히 강하고, 거기에는 가식이 없다고 보지만 그런다고 되겠나. 문 대통령도 마지막까지 (정치 안 하겠다고) 버텼는데, 버티다 버티다 재간이 없으니 나오셨다. 전통적으로는 조기에 차기 주자가 부각되는 게 대통령에게 바람직하지 않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역으로 대통령에게 도움이 된다고 본다. 이쪽 진영은 사람과 가치로 국민 마음을 얻어야 한다. 사람은 차고 넘칠수록 좋다. 정치변화의 주기도 1987년 이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국회의원 되자마자 그해 대선후보가 돼서 다음에 대통령 된 분(문재인)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조금 더 새롭고 신선한 사람을 선호한다. 집권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요구가 강할 거다.”

문 대통령과 양 전 비서관 사이 자리잡은 조국 민정수석. 사진은 문 대통령 북콘서트 장면. [중앙포토]

문 대통령과 양 전 비서관 사이 자리잡은 조국 민정수석. 사진은 문 대통령 북콘서트 장면. [중앙포토]

-바깥에서 문재인 정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을 텐데.

"주제넘은 일 같아, 이런 질문 받을 때 조심스럽다. 다만, 가끔 과거 내 청와대 경험을 반추해 본다. 참여정부 때 우리도 ‘이렇게 죽어라 일하는데 왜 안 알아주나’하고 억울해했지만, (민심과의) 간극을 절박하게 느끼지 못했다. (축구경기로 비유하면) 선수는 경기장 안에 있는 자기가 경기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중들은 선수들 전체를 보며 결과를 따진다. 하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들이 더 절박하고 더 정확하다고 존중하고 거기서 출발하는 지혜가 중요한 것 같다."

-대통령 지지율 하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

"잠이 안 오더라. 김대중 노무현, 두 분도 이루지 못한 정점을 문재인 정부는 지방선거에서 찍었다. 지방선거 압승은 역대급 그랜드슬램이다. 영남까지 싹 바뀌었다. 하지만 특출난 재주가 있는 누구라 해도 정점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조금씩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제일 좋을 때, 필히 다가올 어려울 때를 참모들이 대비하지 못한 점이다. 대통령은 지방선거 압승 직후 무섭다고 하셨는데, 참모들은 안 그랬던 것 같다. 그게 아쉽다. 국민은 문재인을 뽑았지 그 참모나 가족이나 측근들을 뽑은 게 아니다. 대통령을 제외한 일체 모든 사람이 권력이든 자리든 내 것이 아니고 국민들로부터 대통령을 통해 잠시 위탁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겸손해지게 될 거다. (지금 국면을) 현실로 아프게 받아들이고 새 출발 하면 반전의 계기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쇄신’ 인사설이 나오는 것 아닌가. 청와대 개편 폭은 당연히 크지 않겠나.

“인사 문제를 내게 물으면 어쩌나. (하지만) 청와대 참모들에겐 체력정년이 있다. 워낙 고되서, 1년이 넘으면 체력과 집중력에 한계가 온다. 감독들도 더 잘할 선수를 쓰기도 하고, 다음 경기를 위해 쉬게도 해 주고, 등판 기회를 쌓아줘야 할 선수를 배려하잖나.”

-시기는 어떻게 보나.

“문 대통령은 한 번 결심하면 행동을 늦추는 스타일이 아니다.”

-대통령 비서실장, 정무수석 하마평에 양 전 비서관 이름이 나오더라. 들어가나.

 "내가 안 간다."

 ‘나는 안 간다’와 ‘내가 안 간다’는 뉘앙스가 다른 말이다. 전자는 떠밀려서라도 들어갈 가능성이 있지만, 후자는 아니다.

- 같은 ‘잊혀질 권리파’인 이호철 전 민정수석조차 ‘양비는 언젠간 구원투수로 나서야 한다’던데.

 "그런 얘기 하는 분들에겐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말한다."

-임명직은 안 한다니 선출직, 즉 내년 총선에 출마할 생각은.

”없다. 체질이 아니다.“

- 본인 뜻과 상관없이 대통령이 부를 수도 있지 않나.

"내 뜻을 가장 잘 이해해 주실 분이 대통령이다. 내가 안 한다면 그 취지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인사를 어떻게 하실지는 대통령 판단이시지만, 내가 어떤 자리를 맡더라도 주목을 안 받을 수 없게 돼버린다. 그러면 다른 쇄신인사의 의미가 퇴색된다. 역대 대통령 측근들의 비극을 봐 왔다. 측근 문화도 바뀌어야 하고,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참모도 있다는 선례 하나 남기면 그걸로 족하다."

지난 2016년 문 대통령의 히말라야 트래킹에 동행한 양 전 비서관. 당시 극소수 측근만 트래킹에 참여했다. 그중에는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도 있다.                              [중앙포토]

지난 2016년 문 대통령의 히말라야 트래킹에 동행한 양 전 비서관. 당시 극소수 측근만 트래킹에 참여했다. 그중에는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도 있다. [중앙포토]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 청와대 인사는 단순히 시기적 요인에 따른 ‘임무교대’성격이 아니라 ‘쇄신’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가 입성하는 순간 ‘실세의 귀환’, ‘친정체제 구축’ 같은 평가가 뒤따를 것이다. 그러면 쇄신은 빛이 바랜다. 어떤 자리를 맡아도 힘이 그에게로 쏠릴, 입성 후 상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긴 하겠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겠다. 사실 양 전 비서관이 지금 복귀하면, 현 상황이 최악의 위기임을 자인하는 모양일 수도 있다. 1년 반 만에 막다른 골목에 몰렸음을 인정하는 반증이 된다는 의미다  말은 안 해도, 그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3일 다시 도쿄로 떠났다. ‘이제 갈 데도 없다’면서도. 정처 없는 유랑생활에 지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