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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는 요양보호사가 아니잖니?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한세의 노인복지 이야기(27)  

“한세야, 이제 너희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살면 어떻겠니?”
어머니의 예기치 않은 말에 나는 들었던 밥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2018년 12월 24일 어머니 생일날, 아내와 함께 준비해간 미역국으로 어머니 집에서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저희야 좋지요. 그런데,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에게 “이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 나이가 드니 몸도 여기저기 조금씩 아프고….” 어머니의 담담한 답변이 되돌아 왔다.

나의 모친은 재작년까지만 해도 매일 걸어서 성당에 다니고, 마트에 들러 간단한 생필품을 살 정도로 건강했다. 그러나 관절염으로 인해 작년부터 지팡이가 필요해졌고 성당도 주일미사만 참례한다. [사진 pixabay]

나의 모친은 재작년까지만 해도 매일 걸어서 성당에 다니고, 마트에 들러 간단한 생필품을 살 정도로 건강했다. 그러나 관절염으로 인해 작년부터 지팡이가 필요해졌고 성당도 주일미사만 참례한다. [사진 pixabay]

나의 모친은 올해로 87세다.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12년간 혼자 살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매일 걸어서 성당에 다니고,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단지의 마트에 들러 간단한 생필품을 살 정도로 건강했다. 그러나 관절염으로 오른쪽 다리의 무릎 통증이 심해지면서 작년부터 지팡이가 필요해졌고, 성당도 주일미사만 참례한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같이 살아보자는 어머니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돼 형제들과 의논한 결과 우리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으로 의견이 모인 것이 작년 이맘때다. 그래도 함께 살면 공간적으로 서로 불편할 것 같아 어머니 집과 우리 집을 모두 전세로 주고, 그 돈으로 일산 정발산 밑에 2층 단독주택을 전세로 얻을 요량이었다.

어머니는 1층을, 우리 부부는 2층을 쓰면서 식사는 같이하되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독립된 공간에서 지내면 사생활도 보호되고 조금 자유스럽지 않을까 해서다. 넓지는 않지만 아파트와 달리 정원에 작은 텃밭이나 꽃밭도 만들어 놓으면 어머니가 덜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더해졌다.

그러나 나와 형제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본 어머니는 “나는 아직도 자유스럽게 살고 싶구나. 기도하고 싶을 때 큰 소리로 기도하고, 아무 옷이나 편하게 걸쳐 입은 채 거실도 돌아다니고, 자고 싶을 때 소파에 누워서 낮잠도 자고”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부모를 생각해 주어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1년간 아무런 말이 없었던 어머니가, 덜컥 같이 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니 놀랄 수밖에. “어머니, 작년까지만 해도 혼자 자유롭게 사는 것이 좋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생각이 바뀌게 되셨나요?” 궁금해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수발은 요양보호사처럼 타인도 할 수 있지만 함께 사는 것은 오직 가족만이 할 수 있다며, 며느리는 요양보호사가 아닌 가족이니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같이 살아보자고 이야기하셨다. [사진 pixabay]

수발은 요양보호사처럼 타인도 할 수 있지만 함께 사는 것은 오직 가족만이 할 수 있다며, 며느리는 요양보호사가 아닌 가족이니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같이 살아보자고 이야기하셨다. [사진 pixabay]

“지금도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몸도 여기저기 조금씩 아픈 것 같고. 내가 더는 혼자서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너희들 신세를 지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해져 너와 며느리가 들어와 도와 달라고 하면, 그것은 수발하러 들어오라는 것이지 함께 사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발은 요양보호사처럼 타인도 할 수 있지만 함께 사는 것은 오직 가족만이 할 수 있다.

며느리가 요양보호사가 아닌 가족이니 내가 아파 자리를 보전하기 전에 함께 사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혹 나의 자유가 조금 줄어들어도 말이다. 점점 더 나이가 드니 자유에 대한 생각도 다 내려놓았다. 조금 자유롭지 않아도, 영혼은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구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우리 같이 살아보자.”

어머니 이야기에 아내가 눈시울을 붉힌다. 수발이 아닌 가족으로 같이 살자는 어머니의 배려가 새삼 감사하다.

자유보다 불편한 동거 택한 어머니의 속뜻

어머니께서는 아내에게 시어미와 며느리의 사이가 아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지이자 친구처럼 지내자고 말씀하셨다. [사진 pixabay]

어머니께서는 아내에게 시어미와 며느리의 사이가 아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지이자 친구처럼 지내자고 말씀하셨다. [사진 pixabay]

내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기억은 아주 단편적이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4살 때다. 수류탄 파편처럼 기억나는 몇 개의 장면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여의치 않은 가정사로 인해 4살 이후부터 초중고 때까지 함께 살았다 헤어짐을 반복하고, 대학 시절 2년을 더해도 이제껏 어머니와 산 기간이 10년을 넘지 않는다.

2019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 생각을 하니 조금 걱정도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동거라도 시작하는 것처럼 살짝 가슴이 뛰는 것은 왜일까. 어머니를 모시는데 나보다도 더 적극적인 아내에게 어머니는 상생의 손을 내밀었다.

“얘야, 너와 나는 시어미와 며느리의 사이가 아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지며 친구니 그렇게 지내자.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머니가 원래 저런 분인지, 아니면 오랜 사회경험을 통해 협치의 달인이 된 것인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어머니에게 음식을 해다 나르는 아내를 보면서 웬만한 잔소리를 해도 빙긋이 웃어왔다. 이제 그런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게 되었으니 나에게 더 한 잔소리를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순(耳順)인가 보다.

나도 60이 다 되어 간다. 나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다. 그래도 아직 모실 수 있는 어머니가 있으니 행복하지 아니한가.

이한세 스파이어리서치&컨설팅 대표이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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