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그랜드홀에서 열린 2019 기해년 신년회 인사말을 통해 “우리는 작년 사상 최초로 수출 6000억 불을 달성하고,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열었다”고 말했다. 국민소득 3만불은 인구 5000만 명 이상 규모를 가진 국가 중에서 미국ㆍ독일ㆍ일본 등에 이어 세계 일곱 번째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 중에 이렇게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한국경제는 지표상으론 위기로 보기 어렵지만, 체감경기는 바닥이다. 최저임금 인상, 경직적 근로시간 단축 등에 따른 시장의 충격은 크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성인 103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0.9%가 올해 경제 전망을 ‘부정적’으로 내다봤다. 3만불 시대에 축배를 들지 못하는 이유다. 많은 선진국이 경제가 후퇴하며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봤다. 지난(至難)한 긴 세월의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낸 3만불. 그 시간을 돌아봤다.
2017년 기준 1인당 GNI가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3개국뿐이다. OECD 비회원국은 모나코(1977년), 리히텐슈타인(1987년), 싱가포르(2004년), 카타르(2006년), 마카오(2007년) 5개국이다(괄호 안은 최초로 3만 달러를 넘은 년도). 한국의 국민소득 3만 달러는 세계에서 29번째다.
1963년 100달러를 넘어선 이래 국민소득은 55년 만에 300배로 성장했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는 현재다. 미래는 후퇴가 될 수도, 전진이 될 수도 있다.
▶1954년 한국전쟁 직후 1인당 국민소득 약 70달러
한국전쟁으로 전국은 폐허가 됐다.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움직였다. 남대문 시장 앞 숭례문에 붙은 '휴가장병 우슴쏙에(웃음 속에) 실지강토 밝어(아)진다'는 문구가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 당시 주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1954년 미국에서 한국에 1000만 달러의 구호물자를 보내자며 대중연설을 했다. 반면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켜 정치권을 혼돈 속에 몰아넣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적 기반은 취약했지만, 국민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경제활동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1954년. LG의 전신인 락희화학 공업사가 국내 최초 튜브형 치약 '럭키치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비록 일본 기계를 이용했지만, 비닐장판도 찍어냈다. 국산 1호 비행기 '부활'호는 1954년 4월 김해 공군기지에서 명명식을 가졌다.
한국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 본선에 처음 출전해 한국이란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힘겨웠던 국민의 어깨에 힘을 보탰다.
▶1963년 국민소득 100불 돌파
전후 10년 만인 1963년 국민소득 100달러를 돌파했다. 숭례문도 2년 동안 해체 보수공사를 완료하고 1954년 당시보다 반듯해졌다.
1960~70년대는 한강의 기적을 탄생시킨 시기다. 연평균 경제성장률도 60년대 9.5%, 70년대는 10.4%를 기록하며 경제적 도약의 기반을 다졌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63년 100달러 달성 후 14년 만에 10배 성장해 1977년 1000달러를 돌파한다. 이 기간 경제의 근간이 세워졌지만, 경제개발 논리에 묻힌 정권의 무리한 통치는 지금까지도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국산 자동차가 양산되기 시작했다. 대우자동차의 먼 전신인 신진공업은 '신성호'를 생산 보급했고 기아산업은 3륜 경량 트럭을 생산 보급했다.
위 사진은 1960년대 전화교환원 모습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당시 '자석식 전화기' 시대에는 송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해주는 전화교환원이 필요했다.
1960년대 초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전경이다. 이 모습에서 50년 후 마천루가 하늘을 찌르고, 수십만 인파로 가득 찬 해운대의 여름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1977년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국민소득 1000달러를 돌파한 1977년 정부 시무식은 지금은 사라진 구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 중앙계단 앞에서 열렸다.
서울의 대표적 호텔인 신라호텔 상량식은 1977년 7월 장충동 건설현장에서 열렸다. 신라호텔은 당시 정권의 지시에 따라 특1급 호텔로 지어졌다.
위 사진은 1970년대 반상회 모습이다. 반상회는 주민 상호 간 친목을 도모하고 지역사회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매월 같은 주소(반) 주민들끼리 모여 회의하는 모임이었다. 1976년 5월 이후 당시는 관 주도로 '반상회의 날'(매월 25일)을 제정해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모임으로 운영됐다.
1977년 2월 털모자와 방한대 마스크 등으로 꽁꽁 싸맨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아이들이 강추위로 인한 휴교 조치를 모르고 등교했다가 발길을 돌리고 있다.
'이 약 한번 잡솨바~', '애들은 가라~' 약장수들은 차력시범 등으로 행인의 눈길을 끌어모아 만병통치(?)약을 팔기도 했다. 사진은 1977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부지에서 차력 시범이 열리고 있는 장면이다. 이곳이 지금은 서울 중에서도 강남의 노른자위 땅이 되었다.
▶1995년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한 1995년은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해이기도 하다. 그해 경복궁 뜰에 버티고 있던 구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에서 벗어나면서 주변 환경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됐고, 환경 보호 캠페인이 활성화됐다. 하지만 여전히 일회용 플라스틱과 비닐봉지 등으로 인한 환경오염은 전 지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위 사진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1970~80년대가 지나고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한 1995년 어느 맑은 날 여의도 너머로 보이는 한강 모습이다. 오른쪽 위로 일산방향 강변북로 공사가 한창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1만 달러 돌파 후 승승장구할 것 같던 한국 경제는 1998년 IMF 외환위기로 휘청했다. 1인당 국민소득 역시 1만 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1998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5.5%를 기록하는 등 모든 경제 지표가 곤두박질쳤다. 국민은 허리띠를 졸라맸다. 국민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2년 후 1만 달러를 회복했다.
1997년 11월 21일.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 연출된 날이다.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이날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에서 정부의 국제통화기금(IMF)자금지원 요청 결정을 공식 발표했다.
그해 12월 우리 국민은 장롱 속의 금을 모아 나랏빚을 갚는 데 힘을 보탰다.
▶2006년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한 2006년엔 수출 3000억 달러도 달성했다. 그해 12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 앞에서 기념탑 제막식이 열렸다.
2만 달러를 넘고 2년 만인 2008년 전 세계 경제는 금융위기로 출렁거렸고 한국 경제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2009년 경제성장률은 0.7%로 간신히 제자리걸음을 면했다. 1인당 국민소득도 다시 2만 달러 밑으로 떨어졌고 2010년에야 2만 달러를 회복했다.
2012년 당시 우리나라 무역은 2년 연속 1조 달러를 달성하면서 당시 이탈리아를 제치고 무역 규모로 세계 8강에 올랐다. 2012년은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명을 돌파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 인구 5000만명을 넘는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7번째로 '2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에도 가입했다.
강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