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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째 규제 묶인 GM잔디, 쌓인 허가서류만 60m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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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제주대 아열대원예산업연구소에서 재바하고 있는 한국 들잔디 품종. 연구소는 품종 개량을 통해 골프장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국산 들잔디를 개발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지난 2014년 꽃이 피지않는 제초제 저항성 GM 잔디를 개발해 정부에 재배 승인을 신청한 상태다. [중앙포토]

제주대 아열대원예산업연구소에서 재바하고 있는 한국 들잔디 품종. 연구소는 품종 개량을 통해 골프장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국산 들잔디를 개발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지난 2014년 꽃이 피지않는 제초제 저항성 GM 잔디를 개발해 정부에 재배 승인을 신청한 상태다. [중앙포토]

한겨울 바람에도 잔디는 푸른빛을 뽐냈다. 영상 3도를 오르내리는 쌀쌀한 날씨였다. 정옥철 제주대 아열대원예산업연구소 연구원은 “겨울에도 푸른색을 유지할 수 있도록 품종을 개량한 한국 들잔디”라고 설명했다. 근처에선 붉은색을 띠는 잔디도 보였다.

10년 걸려 GM 잔디 개발했지만 #세계 33조 시장이 그림의 떡 #GM 작물 수입 한 해 1000만t인데 #정부, 안전성 우려에 국내 허가 ‘0’ #50종 개발해 놓고도 재배 못해

지난해 12월 24일 제주대 아열대원예산업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소 뒤 826㎡(약 250평) 규모의 실험 농장에선 전국 각지에서 채취한 460종의 한국 들잔디가 자라고 있었다. 정 연구원은 “전국에 있는 들잔디 품종을 모두 채집해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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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를 나와 성인 키 정도의 울타리가 쳐진 또 다른 잔디 농장으로 들어갔다. 2003년 조성된 이 농장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GM(Genetically Modifiedㆍ유전자 변형) 잔디 농장이다. 이 농장에서 키우는 GM 잔디는 ‘바스타’라는 제초제를 견딜 수 있도록 유전자를 변형했다. 세균을 활용해 세포 수준에서 제초제를 견디는 유전자를 추가한 다음 잔디를 길러내는 데 이 과정에 3년 정도가 든다.

제주대가 제초제 저항성 GM 잔디 개발을 끝낸 건 2000년 초반 무렵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GM 잔디 종자 하나도 판매하지 못했다. 정부가 환경 교란 등을 이유로 국내 재배를 승인하고 있지 않아서다. 제주대는 2007년부터 정부의 재배 승인 문턱을 두드리고 있지만 11년째 열리지 않고 있다. 주무 부처인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GM 작물 1호다 보니 승인 과정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며 “전문가 등이 참여해 심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제주대가 들잔디 품종을 개량해 만든 한라그린7의 모습. 일반적인 한국 들잔디보다 덜 억세다. 강기헌 기자

제주대가 들잔디 품종을 개량해 만든 한라그린7의 모습. 일반적인 한국 들잔디보다 덜 억세다. 강기헌 기자

이런 가운데 세계에는 GM 잔디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GM 잔디 재배를 허가한 데 이어 일본과 중국에서도 정부 승인을 앞두고 있다. 세계적인 작물 중 하나로 꼽히는 잔디는 옥수수 다음으로 시장 규모가 크다. 잔디의 국내 시장 규모는 연간 1조 6000억원 수준이다. 골프장과 공원이 흔한 미국은 30억 달러(33조원)에 이른다.

미국 등이 GM 잔디 개발을 공을 들이는 이유는 관리가 쉽다는 장점 때문이다. 이 연구소 선현진 연구교수는 “잔디는 다른 식물과 어울리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에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관리하기 어렵다”며 “GM 잔디는 기존 들잔디와 비교해 제초제를 자주 뿌리지 않아도 돼 제초제 사용량을 기존 대비 최대 20%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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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승인이 없어 수출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건 GM 잔디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비타민A 함량을 높인 쌀 등 50여종의 GM 작물이 국내에서 개발됐지만, 농가 재배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유전자변형생물체법이 시행된 2007년 이후 정부가 GM 작물의 국내 재배에 대한 승인을 단 한 건도 내주지 않아서다.

그런 가운데 GM 작물 수입은 꾸준한 증가세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에 따르면 2016년 국내로 수입된 GM 작물은 974만t에 이른다. 이중 사람이 먹는 식품용은 200만t, 농업용은 774만t으로 조사됐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매년 1000만t 가까운 GM 작물을 수입하는 이유는 낮은 국내 곡물 자급률 때문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5 양곡 연도(2014년 11월∼2015년 10월) 국내 식량자급률은 50.2%를 기록했다. 하지만 사료용 소비를 포함한 곡물 자급률은 23.8%로 식량자급률과 비교해 절반 이하다. 소와 돼지 등 가축에게 먹이는 곡물의 국내 조달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식품용 GM 작물 수입도 빠르게 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올해 국회에 제출한 ‘GMO 농산물 수입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한 식품용 GM 작물은 377만t에 이른다. 이는 연간 국내 쌀생산(410만t)량과 맞먹는 규모다.

GM 잔디는 GM 작물을 둘러싼 정부의 일관되지 못한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매년 1000만t 가까운 GM 작물을 수입하면서도 안전성을 이유로 국내 재배는 막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철 서울대 그린바이오과학기술연구원 교수는 “한국은 GM 작물 수입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규제에 막혀 종자 하나도 수출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물고기가 잔디를 삼키는 실험 결과까지 정부가 요구했다"며 제초제 저항 GM 잔디를 개발한 뒤 10년째 승인을 못받고 있는 제주대 이효연 교수가 24일 제주대에서 GM 기법으로 제초제를 뿌려도 죽지 않는 잔디를 개발한 성공기를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물고기가 잔디를 삼키는 실험 결과까지 정부가 요구했다"며 제초제 저항 GM 잔디를 개발한 뒤 10년째 승인을 못받고 있는 제주대 이효연 교수가 24일 제주대에서 GM 기법으로 제초제를 뿌려도 죽지 않는 잔디를 개발한 성공기를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그렇다면 GM 잔디에 대한 국내 재배 승인 절차가 11년째 결론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뭘까. 이는 부처별로 제각각인 GM 작물 위해성 평가 심사 과정 때문이다. 유전자변형생물체법은 GM 작물 국내 재배 승인에 앞서 위해성 심사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 심사에 농림축산식품부ㆍ환경부ㆍ보건복지부ㆍ해양수산부ㆍ식품의약품안전처 등 7개 정부 부처가 각각 관여한다. 이와 달리 일본은 GM 작물의 환경 영향 평가는 농림수산성과 환경성이 공동으로 꾸린 위원회가 맡도록 단순화하고 있다. 유장렬 미래식량자원포럼 회장은 “GM 작물에 대한 위해성 평가가 기관별로 각각 진행되다 보니 심사 과정이 중복되고 심사 기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흩어져 있는 심사 기관을 일원화해야 GM 작물에 대한 안전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전문가들은 GM 작물에 대한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효근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명예교수는 “안전성이 걱정된다면 GM 작물 수입을 금지하면 되고, 안전성 우려가 없다면 국내에서 개발한 GM 작물을 수출할 수 있도록 정부가 길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지학 툴젠 종자연구소장은 “세계 종자 시장의 30%를 GM 작물이 차지하고 있고 그 시장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며 “국내 기술로 세계 종자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선 GM 작물에 대한 정부의 분명한 입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S박스 재배 면적 늘어나는 GM 작물..국내선 '완전표시제' 논란

430종.

세계적으로 재배하고 있는 GM 작물이다. 이중 옥수수가 148종으로 가장 많다. 이어 면화(58종)ㆍ감자(45종)ㆍ카놀라(38종)ㆍ콩(34종) 순이다. 2016년 기준으로 26개국 1억8510만 헥타르에서 GM 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이는 남한 면적의 20배 규모다.

매년 늘어나는 재배 면적만큼이나 GM 작물은 국내에서도 뜨거운 이슈다. 지난 5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등장한 GMO 완전표시제 시행을 촉구하는 청원이 대표적이다. 20만명을 넘어선 GMO 완전표시제 청원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다. GMO를 사용한 식품이면 GMO 단백질 유전자가 남아 있지 않아도 GMO 제품으로 표시해야 한다는 게 청원의 요지다. 현재는 GM 콩이나 옥수수로 짠 기름은 GMO 단백질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GMO 식품으로 표시하지 않아도 되지만 완전표시제가 시행될 경우에는 GMO 식품으로 표기해야 한다. 윤철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국장은 “중국산 배추에 원산지 표시를 하는 것처럼 소비자에게 GMO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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