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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에스컬레이터 한줄? 두줄?…정답없이 안전만 외치는 정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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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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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정부가 ’한줄서기로 인해 에스컬레이터 사고와 고장이 늘고 있다“라며 ‘두줄서기’ 캠페인을 도입하자 지하철 운영사들이 동참했다. [중앙포토]

2007년 정부가 ’한줄서기로 인해 에스컬레이터 사고와 고장이 늘고 있다“라며 ‘두줄서기’ 캠페인을 도입하자 지하철 운영사들이 동참했다. [중앙포토]

회사원 김 모(44) 씨는 얼마 전 서울 시내 지하철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다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약속 시각이 빠듯해서 에스컬레이터의 왼쪽으로 걸어 올라가던 중 40대 남성이 막고 서있어 비켜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 남성이 응하지 않으면서 갈등을 빚은 건데요.

2002월드컵때 한줄서기 도입 #2007년 정부 “두줄서기 안전” #시민여론 ‘한줄서기’ 선호하자 #정부, 3년 전 두줄서기 중단선언

“바쁜 사람을 위해서 오른쪽에 한 줄로 서면 좋지 않냐”는 김 씨의 요구에 이 남성은 “안전을 위해 서서 올라가는데 왜 비켜줘야 하냐”며 항의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갈등은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곳곳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한줄서기’와 ‘두줄서기’가 여전히 충돌하고 있는 건데요. 이런 현상의 시작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부 차원에서 ‘두줄서기’ 캠페인을 시작한 시점인데요. 앞서 대세는 ‘한줄서기’였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1990년대 후반 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바쁜 사람을 배려하자”는 취지로 한줄서기 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가까운 일본을 비롯해 홍콩, 대만, 캐나다, 유럽 등 많은 나라에서 한줄서기를 하는 게 참고가 됐습니다. 일본 등 선진국에선 어린이를 동반하거나 노약자를 부축한 경우처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곤 모두 한줄서기가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지하철역엔 에스컬레이터도 그리 많지 않았고 이렇다 할 통행 방식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줄서기 운동이 시작되자 많은 지하철 이용객들이 자연스레 참여하게 된 건데요.

외국에선 어린이 동반 등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 한줄서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사진 블로그 캡처]

외국에선 어린이 동반 등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 한줄서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사진 블로그 캡처]

하지만 2007년 정부가 “한줄서기로 인해 에스컬레이터 사고와 고장이 늘고 있다”며 ‘두줄서기’ 캠페인을 들고나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서울메트로 등 지하철 운영기관들이 일제히 두줄서기를 주창했지만 이미 한줄서기가 상당 부분 익숙해진 시민들이 잘 호응을 하지 않은 때문인데요.

그러다 보니 계속 한줄서기를 원하는 시민들과 두줄서기에 동참하려는 시민 사이에 충돌이 잦아진 겁니다. 그리고 정부 측 주장처럼 한줄서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 사고가 늘었는지를 두고도 논란이 적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2000년부터 2008년 8월까지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현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 보고된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사고 125건을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요. 2004년 3건이던 사고는 2005년 15건으로 늘었고, 2006년과 2007년에는 각각 31건씩으로 급증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정부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얘기는 달랐습니다. 관리원 측은 사고 증가의 주된 원인으로 ▶2005년 7월 승강기 관련법 개정에 따른 사고 신고 의무화 ▶2003년 이후 에스컬레이터 설치 대수 증가를 꼽았습니다. 한줄 타기 탓에 사고가 늘었다는 정부 주장과는 다른 분석인데요.

에스컬레이터 사고 현황

에스컬레이터 사고 현황

사고 유형별로도 ‘서 있다가 넘어짐’이 87건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 서 있다가 스스로 중심을 잃고 넘어진 사고인 겁니다. 반면 ‘한줄 타기로 인해 걸어가다가 넘어진 사고’는 10.4%인 13건에 불과했는데요.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두줄서기 캠페인의 근거를 두고 갑론을박도 적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두줄서기 캠페인을 도입한 지 8년이 지난 2015년 7월에는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는데요. 한 방송사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의뢰해서 에스컬레이터 줄서기 관련 조사를 했더니 국민 10명 중 6명이 한줄서기를 선호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한줄서기를 한다’는 의견이 65.5%로 두줄서기(34.5%)의 2배 가까이 됐습니다. 8년간 정부와 지하철 운영기관들이 적극적으로 두줄서기를 외쳤지만 이미 한줄서기를 경험한 시민들이 쉽게 방향을 바꾸지 않았던 셈입니다.

결국 그해 9월 정부는 공식적으로 두줄서기 캠페인의 중단을 선언합니다. 한줄서기를 선호하는 여론이 적지 않고, 한줄 서기가 에스컬레이터 관련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인데요. 게다가 외국에서도 줄서기 방법 자체를 캠페인으로 삼는 사례가 없다는 점도 참고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정부는 ▶손잡이 잡기 ▶걷거나 뛰지 않기 ▶안전선 안에 타기 등 안전수칙만 강조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안전수칙이 모호합니다. 두줄서기는 공식적으로 중단했지만, 에스컬레이터에서 걷지 말라는 수칙은 사실상 두줄서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인데요. 섣부른 두줄서기 캠페인 도입으로 혼란을 부추긴 정부가 뒤늦게 발을 빼면서 논란의 소지를 그대로 남겨둔 겁니다.

이 때문에 두줄서기 홍보 문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한줄서기와 두줄서기의 갈등과 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선진국처럼 시민들이 실제로 경험하며 가장 효율적이라고 공감해서 한줄서기를 선택한 과정이 우리에겐 없었던 탓이기도 한데요. 한줄서기도 시민단체의 운동에서 시작됐고, 두줄서기 역시 정부의 캠페인으로 등장한 겁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현장에선 한줄서기와 두줄서기를 두고 충돌이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시민들이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안전한 방식에 대한 공감대를 널리 형성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런 수순에서 정부는 더는 개입하지 않아야 할 겁니다. 섣부른 개입은 해결보다는 혼란만 부추길 뿐일 테니까요.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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