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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도 없이 온 환자 돌봤는데…한 의사의 씁쓸한 세밑 죽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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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형병원서 정신과 진료받던 환자가 의사 살해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진료 상담을 받던 환자가 의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31일 경찰 과학수사대 대원들이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2018.12.31   kan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서울 대형병원서 정신과 진료받던 환자가 의사 살해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진료 상담을 받던 환자가 의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31일 경찰 과학수사대 대원들이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2018.12.31 kan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서울 대형병원에서 환자가 휘두른 휘두른 흉기에 찔려 의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의료계가 충격에 빠졌다. 의료진 안전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던 중 의사를 살해한 혐의(살인)로 박 모(30)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1일 밝혔다. 박씨는 지난 31일 오후 5시 44분께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던 중 임세원(47) 교수에게 흉기를 휘두른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진료실에서 흉기를 휘두르기 시작했고, 피해자가 진료실 밖으로 피하자 뒤쫓아 나가 3층 진료 접수실 근처 복도에서 가슴 부위를 수차례 찔렀다. 임 교수의 유가족은 "자기만 살려고 했다면 당하지 않았을텐데, 간호사들 안전 챙기는 과정에서 제대로 피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와중에 계속 피하라고 알리고, 피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경찰은 피해자 임 교수의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오는 2일 부검할 예정이다.

가해자 박씨는 이날 임 교수의 마지막 환자였다. 조울증을 앓고있던 박씨는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뒤 수개월동안 병원을 찾지 않다가 이날 예약 없이 갑작스레 진료를 받으러 왔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오후 늦게까지 진료를 보던 임 교수는 예약 없이 찾아온 환자를 마다하지 않고 돌보다 변을 당했다. 임 교수는 우울증ㆍ불안장애 전문가로 자살 예방에 애써왔다. 한국형 표준 자살 예방 교육인 ‘보고ㆍ듣고ㆍ말하기’를 고안해냈다.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저서 ‘죽고싶은 사람은 없다’를 내기도 했다. 평소 심한 허리 디스크를 앓아 통증을 견디면서도 환자들에게 정성을 쏟아왔다고 한다.

동료 의사들은 인술을 펼쳐온 임 교수의 사고 소식에 망연자실해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임 교수는 본인에겐 엄격하고 환자에겐 더없이 너그럽던 의사였다. 사고 당일 오전 모교인 고려대 의대에서 학생들에게 자살 예방 교육을 의무화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기뻐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온라인카페와 SNS에서는 진료받던 환자들의 추모 글도 이어졌다. “설마 아니겠죠. 제가 한창 힘들 때 보듬어주셨던 교수님인데…”(ildo***)

병원에서 환자가 진료 중인 의료진에게 폭행을 휘두르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2017년 병원에서 의료인 폭행ㆍ협박 등으로 신고ㆍ고소된 사건은 893건이었다. 하루 2~3번 꼴로 의료인 위해 행위가 발생했다는 얘기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내과 교수는 “인턴ㆍ전공의 시절부터 진료 중에 환자에게 멱살 잡히고 뺨 맞는 정도의 폭행은 안 당해본 의사가 없을 정도로 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박종혁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진료실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에게 폭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는 의료진 뿐 아니라 다른 환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다”라고 강조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강북삼성병원 의료진 사망사건에 관련한 의료 안정성을 위한 청원’이 올라와 1일 오후 3시 기준 1만3000명이 참여했다. 청원자는 “의료진과 치료받는 환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병원에서의 폭행에 대해서 강력히 처벌하고, 의료진과 환자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달라”고 주장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

[청와대 청원 게시판]

전문가들은 “의료진 안전 장치가 강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동우 인제대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의료진의 안전을 위해 해외처럼 진료실 내 대피를 위한 뒷문, 비상벨, 안전 요원 세가지 요소는 마련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희대병원 백 교수는 “일본ㆍ미국 병원에선 정신과 등 일부 과의 경우 병동에 들어서러면 금속탐지기를 통과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지난해 연말 응급실 내 의료진 폭행 사건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일반 진료실이나 병동에서 폭력을 행사한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고생하는 의료인을 위협하는 행위는 근절돼야 한다. 의협과 논의해 의료진 안전 강화 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이에스더·권유진 기자 etoile@joongang.co.kr

흉부외과와 보고듣고말하기
(故임 모 교수가 생전 SNS에 남긴 글)

요즘 ‘흉부외과’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내가 인턴이였던 1996년, 나는 흉부외과의사가 되고 싶었다.

흉곽을 절개하고 나면 내 눈앞에서 박동치는 붉은 심장이 드러난다.

혈액을 심장밖에서 순환시키는 체외순환기를 비롯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장치들을 조정하며 집도하는 흉부외과의사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보였다.

수술이 끝난 후 중환자실에서 밤새 환자를 keep하는 1년차 선생님을 돕는 것이 인턴인 나의 임무였지만 그것도 정말 멋있었다. 주치의인 1년차 선생님은 소변주머니로 노랗게 환자의 소변이 잘 나오자 정말 기뻐했다. 그것은 혈액과 체액의 순환이 원활하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나도 기뻤다.

생면부지의 환자곁에서 밤을 세우며 우리는 사명, 생명, 사랑, 인권 뭐 이런 거창한 말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진짜 의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흉부외과의사가 될 수 없었다.

내가 흉부외과에 관심을 보이자 전공의 선생님들은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다. 어느 날 응급실로 폐암말기 환자가 방문했다. 당시 당직이셨던 3년차 선생님은 내게 흉곽천자(thoracentesis)를 해보라고 하셨다. 이전에도 1번 해보았던 술기였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3년차 선생님께서 이어 받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그 환자에게 유독 미안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분이 사망했다...

그 죽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내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스스로 자책했고 절망했다.

아둔한 나의 손을 탓했다.

이런 간단한 술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내가 과연 나의 무능력으로 내손으로, 내 눈 앞에서 누군가를 죽게 한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흉부외과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흉부외과와는 가장 거리가 먼, 아둔한 손으로도 최소한 환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정신과의사가 되었다.

전공의 2년차 시절, 나는 자신만만한 정신과 레지던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전 퇴원시켰던 할머니 환자가 나를 찾아왔다. 반복성 우울증으로 5~6번 입원하셨던 분이지만 내가 주치의를 맡았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였던 환자였다. 남편을 사별하고 자녀들은 모두 출가하여 혼자 사는 집으로 퇴원하시는 것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우울증상 자체는 많이 호전된 상태에서 퇴원했기 때문에 나는 반가운 인사로 할머니를 맞이했다. 그리고 서로 감사와 안부를 전하는 대화를 조금 하고 나서 그 분은 내게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는 말을 선생님께 꼭 전하고 싶었다” 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였지만 그때 나는 너무 바빴고 할머니의표정도 그리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기에 나는 더 이상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할머니의 아들이 찾아왔다. 할머니께서 자살하셨고 자살임을 확증하기 위해 경찰에 우울증 진료기록을 제출해야 한다는 말을 하셨다.

나는 또다시 자책했고 절망했다…

어떻게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는가?

손도 머리도 이렇게 아둔한 의사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리고 10여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나는 경희대학의 백종우교수, 서울대학의 김재원 교수와 함께 ‘보고듣고말하기’를 만들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외롭다.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으며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는 절박하고 애처러운 신호를 보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외롭게 죽어간다.

그리고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그렇게 떠나 보낸 남은 사람들은 그 때 그 신호를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절망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먼저 보아주어야 한다. 알아야 볼 수 있다. 그러니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들어야 한다. 듣고 나서도 또 듣는다. 잘 들을 수 있는 방법도 알려야 한다.

충분히 들은 후, 그제서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살릴 수 있게 말하는 방법을 알려야 한다.

그것이 ‘보고듣고말하기’의 전부이다.

힘들어도 오늘을 견디어 보자고, 당신의 삶에 기회를 조금 더 주어 보자고,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 함께 살아보자고…

나는 손재주도 없고, 건강도 그리 좋지 못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김재원 교수와 백종우 교수는 앞으로도 평생의 동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삶을 보호하고 싶다는 진심을,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이 주는 따듯한 희망을 우리가 함께 만드는 ‘보고듣고말하기’에 담고 있다.

지난 금요일 공군에 이어 ‘대한민국 육군을 위한 보고듣고말하기’를 완성했다.

육군은 10월부터 모든 장병에게 ‘보고듣고말하기’를 교육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역하면 사회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 전파되면서 우리의 진심을 전할 수 있길 바란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외국인이지만 한국어를 배운 사람들까지도 모두 ‘보고듣고말하기’를 통해 서로를 지켜줄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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