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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갑질과 잊혀질 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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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 차장

하현옥 금융팀 차장

김중혁의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는 가상의 ‘딜리터(Deleter)’라는 직업이 등장한다.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살아생전 남긴 흔적을 지워주는 탐정이다. 대상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아 있을 하드디스크나 온라인상의 각종 자료, 휴대전화, 일기장이나 없애고 싶은 편지를 망라한다. 삭제를 원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평판을 지키고 싶어서, 비밀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탓에,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결론은 하나다. 기억이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많은 정보는 데이터베이스(DB)화됐다. 인터넷에는 각종 정보가 떠돌며 흔적을 남긴다. 검색 엔진의 등장으로 기록은 불멸의 존재가 됐다. 과거가 꼬리표와 족쇄처럼 따라다니게 됐다. 온라인에서 자신의 정보 삭제를 요구하는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중요해졌다. 여러 나라에서 이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한 이유다.

때아니게 ‘잊혀질 권리’가 다시 회자(膾炙)되고 있다. 국내에 이 개념을 소개한 송명빈 마커그룹 대표가 3년간 직원을 상대로 폭행과 폭언, 청부살인 협박을 가한 동영상과 녹취 파일이 28일 공개되면서다. 그의 행태는 엽기적인 갑질을 일삼아 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개정의 계기가 된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에 버금간다는 것이 세간의 반응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갑질이 폭로되기 하루 전인 27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으로 불리는 근로기준법과 산업재해보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일명 ‘양진호 방지법’인 이 개정안에 따르면 근로기준법에는 직장 내 괴롭힘을 정의하는 규정이 담겼고, 산업재해보상법에는 업무상 질병 항목에 직장 내 괴롭힘과 고객 폭언 등이 추가됐다.

그에게 폭행과 폭언, 협박을 당한 직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잃어버린 6년이었다. 앞으로도 쉬운 삶은 아닐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갑질과 악행은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렸다. 결코 지울 수 없는 악몽 같은 기억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갑질이 쉽게 잊혀질 것이라 여겼을 터다. 2015년에 출간돼 그를 유명인으로 만들어줬던 자신의 책 제목 『잊혀질 권리, 나를 잊어주세요』처럼. 자신의 뉴스가 온라인을 도배한 지금 그가 떠올려야 할 것은 디지털 전문가인 JD 라시카의 “인터넷은 절대 잊지 않는다(The Net never forget)”는 말이다. 갑질에 ‘잊혀질 권리’는 없다.

하현옥 금융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