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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아듀, 시련의 2018…그런데 아무도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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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폐업 가게 물건 쌓인 황학동 중고 주방기구 거리

서울 중구 황학동 중고 주방기구 거리의 28일 오후. 물건이 쌓여 있지만 손님 발길은 끊겨 썰렁한 분위기다.

서울 중구 황학동 중고 주방기구 거리의 28일 오후. 물건이 쌓여 있지만 손님 발길은 끊겨 썰렁한 분위기다.

울분과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룬 이가 많았다.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이 그랬다. 폐업 신고 100만 건. 생업 포기가 이처럼 속출한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생 줄이고, 직원 자르고, 가족 손을 빌렸다. 그래도 버틸 수 없어 끝내 가게 문을 닫았다. 월급 주는 걱정 없이 살아온, 몸으로 돈 버는 게 뭔지 모르는 위정자들을 원망했지만 돌려받은 것은 ‘그림의 떡’ 아니면 ‘언 발에 뿌린 오줌’ 같은 것이었다. 2018년, 자영업자들에겐 악몽의 해였다. 정말 꿈이라면 심호흡 한 번 하고 정신 차리면 될 일, 하지만 끔찍하게도 현실이었다. 게다가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해 희망을 말하고 덕담을 주고받는 것이 사치로 느껴지는, 망한 가게들의 잔해가 널려 있는 시장을 둘러봤다.

폐업 점포 주방기구 사서 되파는 #황학동 가게에도 손님 발길 끊겨 #“현실을 모르는 정책이 불경기 불러, #대통령이 북한만큼 경제도 챙겨야” #내년 걱정에 시름 더 깊어진 상인들 #자영업자 악몽의 해 이렇게 저문다

서울 중구 황학동의 중고 주방기구 거리. 식당과 커피숍에서 쓰인 물건 중 아직 제 수명을 다하지 않은 것들이 쌓여 있는 곳이다. 냉장고, 조리대, 반죽기, 고기 자르는 기구, 에스프레소 기계, 오븐 등 ‘먹는 장사’에 필요한 도구들은 다 있다. 중앙시장 후문 쪽 이면도로와 그 옆의 작은 골목에 줄지어 선 중고 주방기구 가게는 약 180개. 점포에 진열된 중고품과 그 가게 주인들이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물건으로 단박에 식당 1000개는 차릴 수 있다는 전설이 흐른다.

지난여름 신문과 방송은 이곳으로 문 닫은 가게 물건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망한 식당에서 나온, 멀쩡해 보이는 주방기구들이 트럭에 실려 헐값에 중고상에게 넘어가는 현장을 전했다. 중고품 거래업이 ‘미안한 호황’을 맞고 있다고 했다.

장화 속의 언 발을 따듯한 물로 녹이고 있는 주방기구 거리 상인의 모습이다. [김상선 기자]

장화 속의 언 발을 따듯한 물로 녹이고 있는 주방기구 거리 상인의 모습이다. [김상선 기자]

정말 그럴까. 28일 오후 그곳에서 만난 상인들은 “뭘 모르고 하는 헛소리” “우리도 망하게 생겼다” 등으로 반응했다. “물건 매입 안 한 지 좀 됐어요. 아주 새것이 싸게 나오면 몰라도 3, 4년 쓴 물건은 우리도 이제 안 삽니다.” 대형 점포를 가진 T상점 주인 이모씨가 말했다. 그 옆 가게 S사의 변모 사장은 “지난달에 하나, 이번 달에 하나, 창고 두 개 다 정리했다. 창고 임대료 감당이 안 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상인들의 설명은 이렇다. 지난봄과 여름에 부쩍 중고 주방기구 매물이 늘었다. 문 닫은 가게가 많았다는 얘기다. 중간 수집상들이 상인들의 눈물 어린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새것과 다름없는 물건도 싸게 거래됐다. 좋은 물건 놓치기 싫은 게 상인 마음이다. ‘좀 지나면 경기가 풀리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높은 분들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물건은 점점 쌓여갔다. 창고가 가득 찼다. 그런데 사는 사람이 확 줄었다. 식당·커피숍 개업이 감소했고, 그 여파는 중고시장에까지 미쳤다. 형편이 어려워진 식당 주인들이 낡은 주방기구를 바꾸지 않고 고쳐 쓰니 새것 같은 헌것도 갈 곳을 잃었다. 더는 쌓아 둘 데도 없고, 중고 값도 계속 내려가 한숨만 나온다는 게 이곳 상인 공통의 하소연이다.

그 거리에서 4년째 장사해 온 오모씨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다. 약 70㎡(20평) 규모의 그의 가게 안에는 에스프레소 기계, 제빵기가 가득했다.

이 동네 사장님들 장사 안된다고 다들 아우성이네요. 진짜 그런가요.
“이미 문 닫은 곳 꽤 있어요. 매물로 내놓은 곳도 많고요. 이 업의 특성상 조용히 매수자를 찾기 때문에 겉으로 표가 안 나서 그렇지 지금 가게 정리하려는 데 많아요. 저도 누가 권리금 보장해 준다고 하면 넘길 겁니다.”
어느 정도로 어려운 건가요.
“한 달에 300만원쯤 적자가 납니다. 매출이 1년 새 반 토막 났고요. 요즘 물건 한 개도 못 파는 ‘공치는 날’이 많아요. 자영업자들이 가게를 새로 내야 여기가 장사가 되는데, 요즘 누가 식당 차리려 하나요. 여기 직원이 원래 둘이었는데, 지난달에 한 사람 나갔어요. 장사 안되는 것 뻔히 아니까 미안해서 그만둔 거죠. 저도 잡지 못했고요.”
그렇게 적자가 나는데 어떻게 버팁니까.
“근처에서 테이블 4개짜리 작은 고깃집 장사를 해요. 그 가게가 원래는 커피숍이었어요. 오전·오후 교대로 바리스타 두 명 두고 장사했죠. 지난해 인건비, 재룟값이 많이 올라 거기서도 적자가 났어요. 하는 수 없이 저녁에 제가 가서 일할 수 있는 고깃집으로 업태를 바꿨습니다. 직원 하나 두고 장사하고 있어요. 일자리가 하나 줄어든 거죠. 거기서 버는 제 인건비로 여기 적자를 메우고 있습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건비 크게 오르고, ‘52시간’ 때문에 저녁 장사가 안되니 영업용 주방기구 수요가 없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요.”
정부가 잘못한 건가요.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책상에서 정책을 만들어서 그렇죠. 전 문재인 대통령 찍은 사람이에요. 아직도 지지하고요. 그런데 북한에 쏟는 정성을 경제에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우선 우리가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 거리의 상인들도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하나의 요인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한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IMF 사태(1990년대 후반의 경제난) 때 회사에서 잘린 사람들이 식당, 치킨집 엄청 열었잖아요. 그때가 이 동네 최고 호황기였어요.” 새 경제구조는 고용 문제를 낳았다. 먹고살기 위해 너도나도 장사를 시작했다. 포화 상태, 아니 이미 그 수위를 넘은 자영업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로 휘청였다. 2016년 말 시행된 ‘김영란법’은 손님을 줄였다. 그리고 올해 최저임금이 16.4% 오르고, 그 영향으로 재료비가 덩달아 뛰었다. ‘미투’ 열풍에 회식이 줄었고,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으로 저녁 장사가 더 썰렁해졌다. 상인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52시간제를 ‘엎친 데 덮친 것’ ‘우는 아이 뺨 때린 것’ ‘불난 데 기름 부은 것’ 등으로 표현했다.

사회 한편에는 망하는 사람 때문에 바빠진 이도 있다. 폐업 컨설팅 업체 ‘폐업119’의 고경수 대표가 그중 하나다. 자영업자·소상공인이 폐업 때 손해를 덜 보도록 돕는 그의 일이 올해 지난해에 비해 30% 늘었다. 지난해 컨설팅 건수가 713개였는데 올해는 지난달 말까지 914건이다. 그는 컨설팅 비용을 받지 않는다. 다른 사업에서 버는 돈으로 업체를 운영한다. “5년 전 이 일을 시작했는데, 죽어가는 사자의 고기를 노리는 ‘하이에나 비즈니스’처럼 느껴져 수익을 포기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 대표는 “올해 서울 강남역 주변 등 유동인구 많은 주요 역세권에서도 식당들이 문을 닫았다. 정책 결정권자가 자영업자를 자본가로 봐서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장에서 느끼는 감으로는 내년에는 더 나빠질 것 같다. 한 달에 200만원만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있으면 권리금 포기하고 장사 접겠다는 사람이 줄 서 있다”고 했다.

황학동 상인들도 그랬다. 누구도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장사 대란(大亂)의 먹구름이 드리워진 2018년의 끝자락. 그들의 암울한 예상이 빗나가기를 기원하지만, 반전의 싹은 보이지 않는다.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 간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