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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에 이길까봐 옷고름 안 달고 기다린 누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23)

2010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이몽학 역을 맡은 배우 차승원. 이몽학은 임진왜란 이후 흉년과 탐관오리들 때문에 백성들의 하루살이가 심히 곤란해지자 1596년 '이몽학의 난'을 일으켰다. [중앙포토]

2010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이몽학 역을 맡은 배우 차승원. 이몽학은 임진왜란 이후 흉년과 탐관오리들 때문에 백성들의 하루살이가 심히 곤란해지자 1596년 '이몽학의 난'을 일으켰다. [중앙포토]

임진왜란 이후 흉년과 탐관오리들 때문에 백성들의 하루살이가 심히 곤란해지자 1596년(선조 29년)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 있다. 왕족의 서얼 출신이었던 이몽학이다. 본래 서울에 살았으나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 집에서도 쫓겨나고 충청도나 전라도 사이를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반란은 관군의 진압과 반란군 내분 때문에 실패하고 이몽학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에 의해 이몽학에 관련한 이야기가 몇 가지 전해진다. 이몽학이 어렸을 때 버들잎을 모아 쥐고 뿌리면서 냇물을 건넜다는 신통력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에 더해 이몽학이 혁명에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성 쌓기 내기 벌인 이몽학과 누나

이몽학에게는 영특한 누나가 있었다. 누나는 동생이 크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싶어 항상 염려했고, 이몽학은 누나를 그대로 두면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몽학은 누나에게 자신이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에 다녀올 동안 누나는 성을 쌓으라고 말했다. 먼저 끝내는 사람이 진 사람을 죽이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몽학의 누나가 눈 깜짝할 새 성을 다 쌓아버리자 아들이 죽을까 불안했던 어머니는 이몽학의 누나에게 팥죽을 많이 쑤어 두고는 먹게 했다. 이몽학의 누나는 속셈을 알아차렸지만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죽을 먹었다. [중앙포토]

이몽학의 누나가 눈 깜짝할 새 성을 다 쌓아버리자 아들이 죽을까 불안했던 어머니는 이몽학의 누나에게 팥죽을 많이 쑤어 두고는 먹게 했다. 이몽학의 누나는 속셈을 알아차렸지만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죽을 먹었다. [중앙포토]

둘의 내기가 시작돼 누나는 눈 깜짝할 새 성을 다 쌓아 이제 문만 달면 됐다. 이몽학의 어머니가 가만 보니 아무래도 아들이 질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팥죽을 많이 쑤어 놓고는 “얘, 네 동생 오려면 아직 멀었어. 시장할 테니 요기나 좀 하고 계속해라” 하고는 딸을 불렀다.

이몽학의 누나는 어머니의 속셈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죽을 먹는 동안 동생이 도착할 시간이 될 것을 알았지만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죽을 먹었다. 그사이에 도착한 이몽학은 성이 완성되지 않은 것을 보고 누나를 없앴다. 그러고 나서 이몽학이 결국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역적이 난 곳이라고 해 그 지방 출신에게는 벼슬을 내리지 않았다.

어려운 시절엔 힘없는 사람은 세상을 뒤바꿀 영웅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마련이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들 영웅이 난세를 구하는 활약을 보이지 못하는 데에는 부모의 불안감이 한몫한다. 그것도 매우 크게. 그 불안감은 ‘아기 장수’에서 비범한 자식을 직접 눌러 죽이는 부모에게서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이몽학의 이야기에서는 아들보다 뛰어난 딸이 등장하는 데서 눈여겨볼 지점이 생겨난다.

이 이몽학의 누이가 김덕령의 누이로 등장하기도 한다. 김덕령은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돼 고문당하다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덕령 역시 축지법을 쓰는 등 신통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가 다수 전해진다. 김덕령은 누이에게 김덕령이 무등산을 한 바퀴 돌고 오는 동안 누나는 옷을 한 벌 짓는 내기를 제안했다.

김덕령의 누나는 동생과의 내기에서 다 지은 옷에 일부러 고름을 안 달고 있다가 결국 게임에서 져 동생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들 누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중앙포토]

김덕령의 누나는 동생과의 내기에서 다 지은 옷에 일부러 고름을 안 달고 있다가 결국 게임에서 져 동생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들 누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중앙포토]

누나는 옷을 다 지었지만 일부러 고름을 안 달고 있다가 결국 게임에 져 동생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몽학의 이야기나 김덕령의 이야기나 누나가 남동생보다 훨씬 나은 지략과 힘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통해 힘을 잘못 쓰게 될 동생을 염려하고 경계했지만, 결국 남동생을 살리고 자신을 죽이는 쪽으로 선택함으로써 비극적인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들 누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누나라는 존재가 영웅의 실패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 것일까. 이 누나들 이야기 속에는 어마어마한 가부장의 혹독한 질서가 숨어 있다. 기어이 제거해야 했던 존재와 힘으로 상징되는 이야기 속 누나를 통해 현대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초반에서부터 누나의 관심은 남동생의 힘에 있었다. 누나가 남동생의 힘을 경계하는 이유는 남동생이 함부로 힘자랑하며 다니는 꼴을 보아하니 필경 일을 벌이고야 말 것인데, 그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방향이라기보다 파괴적인 힘을 가진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남동생은 누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느꼈다. 자신은 충분히 힘이 있고, 남들과 경쟁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었으며, 심지어 누나라 하더라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힘으로 제압하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를 남성의 일반적인 인식구조라고 단박에 규정지어 버리면 너무 편협하다고 할 것이나, 또 한편으로는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만 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이들 이야기의 남성은 기존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엎고 싶다는, 그래서 바뀐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남다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뛰어난 능력은 이야기 속에서 축지법이나 나무 이파리 타고 냇물 건너기 등으로 형상화한다. 이렇게 뛰어난 능력은 집안에 하나여야 한다. 바로 그 지점이 여성의 존재 자체가 없어져도 되는 속성을 갖게 한다.

흔히 '오뉘 힘내기' 형이라고 불리는 이야기 속 누나들은 자신이 아무리 염려하고 경계해도 세상은 늘 그랬듯 자신보다는 남동생 중심으로 질서가 형성되고 운영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진 pixabay]

흔히 '오뉘 힘내기' 형이라고 불리는 이야기 속 누나들은 자신이 아무리 염려하고 경계해도 세상은 늘 그랬듯 자신보다는 남동생 중심으로 질서가 형성되고 운영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진 pixabay]

흔히 ‘오뉘 힘내기’ 형이라고 불리는 이야기 속 누나들은 자신이 아무리 염려하고 경계해도 패배로 이어질 것이 뻔한 남동생의 힘자랑을 두고만 볼 수 없지만 세상은 늘 그랬듯 자신보다는 남동생을 중심으로 질서가 형성되고 운영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가 팥죽을 끓여 놓았으니 먹으라고 줄 때도 아무 소리 없이 받아먹으며 시간을 허비했고, 심지어 옷 짓기를 빨리 끝내버려서 남동생을 이기는 일을 만드는 것은 결국 누구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할 일임을 알았기에 고름 하나를 남겨 놓고는 일부러 달지 않고 있었다.

아들 살리려고 딸을 방해한 어머니

세상의 딸들을 결정적으로 좌절시킨 것은 어머니가 나서 딸을 방해하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아들을 살렸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확고한 믿음은 안 그래도 남동생의 힘에 눌릴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는 딸에게 완전한 좌절을 안겨 준다.

성 쌓기 게임에서 문짝 하나만 달면 성이 완성될 참인데, 그때 굳이 뜨거운 팥죽을 끓여 주며 꼭 ‘시장할 텐데 좀 먹고 쉬엄쉬엄하렴’ 등의 짐짓 염려스러운 눈빛과 말투를 보이는 어머니, 그러나 그 속엔 딸의 존재를 무시하는 공격적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매우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인생 사연 중 하나가 남동생들 공부시키느라 일찌감치 취직해 돈벌이에 나선 딸들의 이야기이다. 딸들은 제아무리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능력이 출중해도, 심지어 자신보다 머리도 나쁘고 빈둥대는 남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차가운 공장 바닥에서 신음해야 했다.

지금이야 세상 좋아져서 그나마 그 모진 세월을 잘 견뎌낸 누나들이 할머니가 되어서라도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을 땐 대학이든 문화센터든 갈 만한 곳이 있다. 아들, 딸 할 것 없이 동등하게 집안일을 분담하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목소리와 힘을 보장받는 경우가 늘어나긴 했다.

그러나 우리 집이 그렇다고 해서 남의 집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아는 편협함만은 좀 벗어나 보자. 어머니들이 아직 충분히 달라지지 못했고, 아직도 말귀 못 알아듣는 아들들이 수두룩하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초빙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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