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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성탄절 아침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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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성탄절 아침 햇살은 눈부시다. 나목도 쩡쩡 어는 새벽에 종소리를 들었던 듯도 싶다. 힘들고 피곤한 몸을 누이고 신새벽 꿈을 꾸고 싶은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사이 울리는 종소리는 축복이다. 그 종소리는 꿈의 뒷마당에서 퍼져 나와 일상의 앞마당에 은근한 은총(恩寵)으로 쌓인다. 그들이 설령 이성의 촛불에만 의지하는 무신론자라 해도, 적어도 오늘 아침만은 성령 그득한 시간을 맞고 싶은 거다.

현실적 강압과 배제가 #이념이던 조선 사회에서 #‘평등, 용서’ 복음이 싹터 #다종교 관용하는 나라 됐지만 #현실은 원한·증오 번득여 #속세의 관용도 서로 나누길

이 땅에 영성이 깃들기까지 혹독한 시련을 겪었기에 더욱 그렇다. 1779년 천진암 서교(西敎) 강학회 이후 100년 동안 양반과 천민, 남녀노소 1만5000여 명이 순교했다. 강학회를 주도했던 이승훈과 권철신은 참수되었고, 정약용은 유배를 갔다. 서강 새남터 모래는 피로 얼룩졌다. 영국 교회사학자 로빈슨(C. H. Robinson)은 “세계의 박해 중 19세기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겪었던 형고가 으뜸이었다”고 썼다.

형고는 그러나 희열을 불렀다. 신유박해(1801년) 때 충청 내포 지역에서 체포된 이기도(바오로)를 마을 장에 끌고 다니면서 수령이 외쳤다. “너는 리마두(마테오리치)에게 속았다. 천주는 없다.” 천주를 부정하라고 수령은 통사정을 했지만, 이기도는 잔혹한 심문과 매질에도 굴하지 않았다. 장거리 인민들은 기쁜 표정으로 죽어간 이기도를 기이하게 여겼다. 주문모 신부와 함께 체포된 황일광은 내포의 백정이었는데 정약종가(家) 하인으로 일했다. 정약종은 조선 최초의 성서 『주교요지』에 이렇게 썼다. “천주가 두 사람에게 자식을 낳게 하고 억만 사람이 다 그 자손이 되게 하고 서로 사랑하기를 하게 하심이라.” 양반과 종은 같이 ‘사람’이었고, 신자로서 평등했다.

평등은 위험천만한 사상이었다. 증오와 원한을 성령으로 녹였으니까. 관용과 용서를 실행한 사람들의 피가 엉긴 새남터 모래는 명동성당 벽돌로 쓰였다. 지하에는 12명의 신부 사해가 안치되었다. 오늘 아침 울린 명동성당 종소리는 12명의 신부와 1만5000여 명의 순교자가 육신을 헌납해 받은 영성의 코러스다.

송호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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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19세기 조선 인민들이 낯선 외래 종교로 몰려갔던 이유는 유교의 텅 빈 내세관 때문이었다. 초월자가 상정되지 않았던 내세(來世)를 성리학과 예학의 단호한 논리와 윤리로 채웠다. 타협과 화해는 변절이었다. 척사(斥邪)와 토사(討邪) 같은 무서운 말들이 만들어졌다. 군주와 조상신은 극한 불안과 위험에 마주한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구제해주지 못했다. 지배층이 믿었던 상제(上帝)는 태극도설이 빚어낸 비인격적 신(神)일 뿐 백성들은 결코 그 존재를 실감할 수 없었다. 동학이 상제를 한울님으로 부르고 인격을 부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제를 천주로 교체하고 유교의 텅 빈 내세에 복음을 전파하자 신자들이 급증했다. 조정이 척사윤음과 토사주문을 발령해 씨를 말리려 할수록 깊은 산중 교우촌(성소)이 늘어났다.

추상과 같은 논리가 수백 년 지배했던 조선에서 다종교 사회가 발아됐다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1898년, 명동성당에서 종교 자유를 알린 최초의 종소리가 타종됐다. 개신교가 확산됐고 불교와 천도교, 대종교, 도교가 포교를 개시했다. 무당과 무속신앙도 산에서 내려와 그 대열에 합류했는데 모두 현실 종교인 유교의 내세관 결핍과 척(斥), 토(討), 양(攘)을 앞세운 배타적 논리 탓이었다. 현실적 강압과 배제의 이념이 기승을 부릴수록 정신적 구제를 향한 민중의 갈증은 식지 않는다.

세계에서 다종교 사회는 정말 보기 드문 현상이다. 외딴섬에 잔존하는 원시부족에게는 여러 유형의 토템이 있을 것인데 인류의 주요 종교가 작은 땅에 병존하는 경우는 한국이 유일하다. 세계 10대 경제대국 중 개신교와 천주교 국가가 일곱 개, 나머지는 힌두교(인도), 유교(중국), 불교와 신도(일본)다. 일본과 중국에서 성당과 교회를 발견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인데 한국에는 편의점만큼 흔하고 명산마다 사찰이, 마을마다 향교가 있다. 한국인들은 종교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너그러운 관용을 길렀다. 이슬람처럼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고 기독교 신자라도 조상께 제례를 올린다. 천주교도와 불교도가 결혼하고, 무신론자와 기독교도가 평생 친구로 지낸다.

그런데 유독 현실정치 영역에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이혼과 절교가 횡행하고 원한과 증오가 번득인다. 올해 광화문광장은 들끓었다. 내년도 그럴 것이다. 5년마다 되풀이되는 혁신정치가 천사와 악마를 바꿔 호명하고 정의와 불의를 새로 규정해 공감의 기준이 어지러워진 탓이다. 배척의 논리는 관용의 바다에서 춤추는 조각배. 교회 종소리가 굴뚝과 지붕에 공평하게 내려앉듯, 오늘만큼은 성계의 은총으로 속세의 ‘관용’을 서로 나눌 일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