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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의 시선

의인들 보낸 X마스 선물, '헬조선'서 본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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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남상건 LG복지재단 부사장(오른쪽)이 강원체육고등학교에서 성준용·김지수·최 지난해 11월 춘천 의암호에 빠진 운전자를 구조한 강원체육고 3학년 성준용·김지수·최태준(사진 왼쪽부터) 군에게 남상건 LG복지재단 부사장이 'LG 의인상'을 전달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LG복지재단]

남상건 LG복지재단 부사장(오른쪽)이 강원체육고등학교에서 성준용·김지수·최 지난해 11월 춘천 의암호에 빠진 운전자를 구조한 강원체육고 3학년 성준용·김지수·최태준(사진 왼쪽부터) 군에게 남상건 LG복지재단 부사장이 'LG 의인상'을 전달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LG복지재단]

제주한라대 조리학과에 다니던 김선웅(19)군은 지난 10월 3일 오전 3시쯤 제주시 정부종합청사 인근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 중이었다. 김군은 새벽에 생계를 위해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올라가던 90대 할머니를 발견했고 주저 없이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할머니와 함께 수레를 끌고 가던 김군은 횡단보도 앞에서 과속 차량에 치였고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개천절 새벽에 쓰러진 김군은 한글날에 신장· 각막 등을 7명에게 기부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10년 전 어머니가 별세할 때 했던 장기기증 약속을 실천했다. 평소 기타를 즐겨 쳤던 김군은 세상에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선율을 남기고 떠났다.

고 김선웅 군

고 김선웅 군

제주한라대 학생 고 김선웅(19) 군의 의로운 희생을 계기로 '김만덕 의인상'을 제정한 김만덕기념사업회 양원찬 공동대표(왼쪽)가 지난 10월 21일 고인의 부친 김형보(가운데) 씨에게 기념패와 상금을 수여하고 있다. 오른쪽은 원희룡 제주지사. 같은 달 31일에는 'LG 의인상'도 받았다.      [사진 제주도청]

제주한라대 학생 고 김선웅(19) 군의 의로운 희생을 계기로 '김만덕 의인상'을 제정한 김만덕기념사업회 양원찬 공동대표(왼쪽)가 지난 10월 21일 고인의 부친 김형보(가운데) 씨에게 기념패와 상금을 수여하고 있다. 오른쪽은 원희룡 제주지사. 같은 달 31일에는 'LG 의인상'도 받았다. [사진 제주도청]

 택배기사 유동운(35) 씨는 11월 8일 오후 4시쯤 전북 고창군에서 배송을 마치고 터미널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석남교차로를 지날 무렵 도로변 논에서 불타는 차량을 발견했다. 유씨는 사고 차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차를 세웠고, 불타는 차에서 경적이 울리자 신속히 119 응급구조센터에 신고했다. 이어 불타는 차 안에서 다친 운전자 김모(36)씨를 밖으로 신속히 구조했다. 차량 폭발에 대비해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다친 운전자의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근무복으로 덮어주고, 119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며 돌봤다. 10여분 뒤 도착한 119구조대에 운전자를 인계하고 자리를 떠났다. 사고 차량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탔지만 유씨의 용기 있는 행동은 빛났다. 박근태 CJ대한통운 사장은 지난 19일 유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불 타는 차량에 뛰어들어 시민의 생명을 구한 택배기사 유동운(35, 오른쪽)씨가 박근태 CJ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지난 19일 감사패를 받고 있다. 지난 4일에는 'LG 의인상'을 받았다. [사진 CJ대한통운]

불 타는 차량에 뛰어들어 시민의 생명을 구한 택배기사 유동운(35, 오른쪽)씨가 박근태 CJ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지난 19일 감사패를 받고 있다. 지난 4일에는 'LG 의인상'을 받았다. [사진 CJ대한통운]

 이 땅의 의인(義人)은 국적을 뛰어넘었다.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니말(38)은 지난해 2월 10일 경북 군위군 산골 마을의 불난 주택에서 90대 할머니를 극적으로 구했다. 구조 와중에 얼굴과 폐에 화상을 입었지만 그는 "평소 마을 어르신들이 나를 따뜻하게 보살펴준 게 고마워 불 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생겼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어머니의 암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불법체류 중이었다는 니말은 이번 선행 덕분에 법무부로부터 벌금을 면제받았고 지난 18일 특별공로자 영주증(F5)을 받았다.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외국인에게 영주증을 준 첫 사례다.

[장세정의 시선] #평범한 대학생·택배기사 등, 위험에 빠진 시민들 위해 주저없이 행동 #'헬조선'이라 비하되는 대한민국에 희망과 빛을 선사한 '의로운 선물'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니말(39)은 지난해 2월 경북 군위의 불난 주택으로 뛰어들어 90대 할머니를 구했다. 당시 그는 얼굴과 폐 등에 3주 화상을 입었다. 지난 18일 법무부로부터 특별 공로자 영주증을 받은 그는 "한국 사람들에게 고맙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니말(39)은 지난해 2월 경북 군위의 불난 주택으로 뛰어들어 90대 할머니를 구했다. 당시 그는 얼굴과 폐 등에 3주 화상을 입었다. 지난 18일 법무부로부터 특별 공로자 영주증을 받은 그는 "한국 사람들에게 고맙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고 김선웅 군, 유동운 씨, 그리고 니말. 세 사람의 공통점은 'LG 의인상' 수상자라는 사실이다. "국가와 사회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한다"는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뜻이 담긴 상이다. 2015년부터 최근까지 모두 89명이 의인상을 받았다.

 직업별로 보면 경찰관 17명(해경 10명 포함), 소방관 13명, 군인 7명 순이다. 봉사를 사명으로 하는 공직자가 아무래도 많다. 그러나 학생 5명, 버스 기사 3명 등 평범한 시민들의 의로운 행동도 빛났다. 연령별로 보니 30대 이하 청년들이 절반이나 차지했다. 30대가 24명으로 가장 많았고 20대가 13명, 10대도 7명이나 된다. 10대와 20·30세대를 합치면 절반에 육박한다. 요즘 젊은 세대가 개인 이익만 챙긴다는 통념과 달리 희생과 헌신에서 결코 기성세대보다 뒤처지지 않았다. 40대와 50대가 각각 20명이었고, 60대 3명, 70대와 80대도 1명씩 포함됐다.

 의인들의 2차 기부는 그들의 선행을 더욱 값지게 했다. 지금까지 25명이 2억3000만원의 상금을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쾌척했다. LG복지재단 사무처 심우섭 국장은 "재단이 파악한 것 외에 주변에 알리지 않고 남몰래 2차 기부한 사례가 더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비하하지만, 의인상 수상자들이 있는 한 한국사회에 아직은 희망이 있어 보인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맹자(孟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폈다.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인간의 네 가지 본성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사양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 등 네가지 마음(감정)이 나온다고 설파했다.
 맹자에 따르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불쌍한 마음이 생긴다. 이를 보고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거나 구하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맹자는 말했다. 우리 시대 의인들은 맹자가 말한 인간의 선한 본성을 행동으로 옮긴 '참사람'들인 셈이다.

조선시대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사상을 집대성한 『 남명집(南冥集)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옮김)과 그의 경의(敬義) 가르침의 핵심(內明者敬 外斷者義)을 새긴 목판. 장세정 기자

조선시대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사상을 집대성한 『 남명집(南冥集)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옮김)과 그의 경의(敬義) 가르침의 핵심(內明者敬 外斷者義)을 새긴 목판. 장세정 기자

 조선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평소 내면을 밝히고(內明者敬) 의로써 판단하라(外斷者義)"며 경의(敬義)를 역설했다. 이(利)보다 의(義)를 중시한 우리 시대 의인들은 남명의 가르침을 실천한 셈이다. 우리 마음에 내재한 선한 본성을 새삼 일깨워준 의인들이야말로 어떤 보석보다 더 존귀한 '크리스마스 선물' 아닐까.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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