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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개 일주문 지나며 123번 나 자신을 안아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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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호 20면

거미줄(web)로 연결된 초연결사회. 수많은 너와 내가 얽히고설켜 지지고 볶으며 산다. 거미줄 속에서 사는 삶. 거미의 지혜가 필요하다. 거미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다. 세로줄에 비밀이 있다. 거미는 거미줄을 만들 때 먹이를 옭아맬 끈끈이를 가로줄에만 발라놓는다. 가로줄은 밥줄이고, 세로줄은 거미의 안식처인 셈이다. 나를 위한 또 하나의 세로줄을 만들기 위해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로 2박3일 쉼표 여행을 떠났다. 일본 규슈(九州)의 북쪽 끝 기타큐슈(北九州)와 혼슈(本州)의 서쪽 끝 야마구치(山口)다. 두 마을은 간몬(関門)해협을 마주하고 떨어졌지만, 1068m 길이의 간몬대교 덕분에 이어졌다.

해안 절벽 위에 들어선 모토노스미 이나리 신사. 바다에서 마침 빛내림 현상이 벌어졌다. 임윤규 기자

해안 절벽 위에 들어선 모토노스미 이나리 신사. 바다에서 마침 빛내림 현상이 벌어졌다. 임윤규 기자

 원자폭탄도 피해간 곳 

 이번 세로줄은 천 리다. 여행이 시작되는 기타큐슈공항에서 여행의 끝인 아먀구치현 우베(宇部)공항까지 250km가 조금 넘는다. 첫 여행지는 고쿠라(小倉)성. 기타큐슈공항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다. 고쿠라는 1945년 8월 지옥이 될 뻔했던 도시다. 원래 미국이 히로시마와 함께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려 한 곳이 당시 무기공장이 있는 고쿠라였다. 하지만 미국은 시계가 안 좋다는 이유로 고쿠라 대신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고쿠라는 하늘이 도운 도시다.

1602년에 지은 고쿠라성. 임윤규 기자

1602년에 지은 고쿠라성. 임윤규 기자

 고쿠라성은 1602년 지어졌다. 5층 천수각엔 도시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성을 둘러본 뒤 성주가 성 밖 별장으로 썼던 고쿠라성 정원으로 향했다. 연못을 따라 돌며 산책할 수 있는 치센다유시키(池泉回遊式) 정원이다.
 정원 옆 일본 전통 말차(末茶)를 파는 찻집에 들렀다. 기모노 입은 여주인이 미소로 맞는다. 말차를 내오는 데 15분 걸린다. 물을 끓이는 찻주전자, 말차를 뜨는 찻숟가락, 거품 내는 차 솔과 다기를 일일이 닦아낸 뒤, 차를 만들어 내온다. 일본 다도의 기본은 일기일회(一期一會)다. ‘당신과 만나는 이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한 번뿐입니다. 이 순간을 귀히 여기고 지금 할 수 있는 최고로 당신을 맞이하겠습니다’라는 의미다.

고쿠라정원 찻집에서 마신 말차. 임윤규 기자

고쿠라정원 찻집에서 마신 말차. 임윤규 기자

 맛난 만남 

 100년 역사의 단가(旦過)시장. 해산물·축산물·채소·분식·간식·반찬 등등 먹거리 파는 가게 120여 곳이 모인 기타큐슈의 부엌이다. 이곳의 명물은 다이가쿠도(大學堂)다. 2008년부터 단가시장이 기타큐슈시립대학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이다. 식당은 식당인데, 밥·국·커피만 팔고 반찬은 안 판다.
 300엔(약 3000원)을 내면 밥과 국을 준다. 그러면 밥이 담긴 밥그릇을 들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먹고 싶은 덮밥 재료를 사 ‘나만의 덮밥’을 만든다. 다이가쿠도 덕분에 시장 전체가 거대한 뷔페식당이 됐다. 기타큐슈시립대학이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낸 아이디어란다. 더불어 살고 더불어 돈 버는 단가시장. 맛있고 재미있고 훈훈하다.

기타큐슈 단가시장 ‘나만의 덮밥’. 새우튀김·생선조림·닭꼬치 등 푸짐하게 올렸어도 1000엔(약 1만원)에 불과했다. 임윤규 기자

기타큐슈 단가시장 ‘나만의 덮밥’. 새우튀김·생선조림·닭꼬치 등 푸짐하게 올렸어도 1000엔(약 1만원)에 불과했다. 임윤규 기자

 단가시장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가면 모지코(門司)항이 나온다. 메이지 시대까지는 요코하마·고베와 대등할 정도로 번성했던 국제 무역항이다. 1889년 개항 이후 들어섰던 서양식 건축물을 1995년부터 복원해 ‘모지코 레트로(門司港レトロ)’ 타운을 만들었다.
 아인슈타인 부부가 1922년 일본에 방문했을 때 묵었다는 모지 미쓰이 클럽도 있다. 느릿느릿 걸으면 멈춰진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31층 100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면 모지코항과 간몬해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모지코레트로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항구 모습. 임윤규 기자

모지코레트로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항구 모습. 임윤규 기자

1922년 아인슈타인(사진 가운데)이 모지 미쓰이 클럽을 방문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

1922년 아인슈타인(사진 가운데)이 모지 미쓰이 클럽을 방문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

 나를 위한 시간 

기타큐슈와 야마구치를 잇는 간몬대교. 임윤규 기자

기타큐슈와 야마구치를 잇는 간몬대교. 임윤규 기자

 간몬대교를 넘어 야마구치현으로 넘어왔다. 제일 먼저 가라토(唐戶)수산시장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복어의 80%가 유통되는 대규모 수산물 시장이다. 복어회 한 접시가 겨우 800엔(8000원)이다. 금~일요일에는 초대형 초밥 좌판이 열린다. 초밥을 잔뜩 사 2층 무료 테이블에서 먹어도 되고, 해변 공원에 나가 간몬대교를 바라보며 먹어도 된다.

일본 복어의 80%가 유통되는 가라토시장. 임윤규 기자

일본 복어의 80%가 유통되는 가라토시장. 임윤규 기자

 가라토시장에서 유모토(湯元)온천까지 100km가 조금 넘는다. 구간 대부분이 해안도로다. 가슴이 뻥 뚫린다. 절반 정도 갔을 즈음 츠노시마(角島)대교가 보인다. 길이 1780m. 일본에서 두 번째로 긴 다리다. 새하얀 백사장과 에메랄드빛 바다, 작은 섬이 더해져 CF에 자주 등장한다.
 다리를 본 뒤 30여km 더 가니 여우의 계시로 지어졌다는 신사 모토노스미 이나리(元乃隅 稲成元)가 나온다. CNN이 일본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선정한 명소다. 새빨간 도리이(鳥居, 신사 일주문)가 터널을 이루며 바닷가 절벽까지 쭉 뻗어 장관을 이룬다. 신사엔 보통 도리이가 한두 개인데, 이곳에는 무려 123개나 있다.
 소원을 비는 일본인이 보인다. 그중에서 5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자신은 소원 대신에 그동안 잘 살아준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자신을 안아주었다고 한다. 그 말에 공감이 갔다. 나도 123개 도리이를 지나며 123번 나를 안아줬다. 건강하게 잘 살아줘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해변 드라이브가 끝나면 600년 전통의 유모토온천이다. 야마구치현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다. 알칼리성 온천수다. 화장수 성분에 가까워 피부미용탕으로도 불린다. 따듯한 온천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눈 녹듯 풀렸다.

 그래픽= 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 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여행정보

진에어가 인천·부산∼기타큐슈 노선을 운행한다. 인천∼우베 노선은 에어서울이 운행한다. 기타큐슈나 야마구치는 대중교통보다 렌터카가 편리하다. 기타큐슈공항에서 차를 빌린 뒤 우베공항에서 반납할 수 있다. 아반떼급 하루 대여료 약 11만원. 기름값은 한국보다 약간 싼 편이다.
취재 협조=일본정부관광국(JNTO)

기타큐슈·야마구치(일본)=임윤규 기자 time25@joongang.co.kr

기타큐슈·야마구치 쉼표 여행 #해안가 신사에서 몸과 마음 충전 #원폭 피해간 고쿠라에서 차 한잔 #단가시장선 나만의 덮밥 먹고 #600년 전통 온천에서 피로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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