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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답답해 죽겠어, 나 좀 여기서 꺼내줘"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13화

젊은 나이임에도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아주 멀리 두고 살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영향이 아닌가 싶다. 마흔둘에 돌아가셨으니 요즘 기준으론 요절이다.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누나의 아버지에 비해 절반만 산 것이다. 누구는 오래 살고 누구는 일찍 죽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생사의 문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았다. 비행기 추락사고에서도 어떤 이는 살아남는다. 30대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절명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이는 다 죽다가 살아나기도 한다.

꼼짝없이 침대를 지고 있는 누나의 아버지는 지금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의식은 큰 문제 없는 상태에서 죽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을 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누나가 요양원 과장을 면담하러 간 사이 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누나 아버지와는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으나 곧 기력이 부치는 것 같아 좀 쉬시라고 했다.

나 좀 여기서 꺼내줘
"나 좀 &다8@@#99"
눈을 감고 있던 누나 아버지가 갑자기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얼른 다가가 귀를 댔다.
"나 좀 일으켜 줘."
"괜찮으세요?"
"답답해 죽겠어."
".....여기가 편하지 않으세요?"
"답답해 죽겠어. 나 좀 여기서 꺼내줘."
"......."

나는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람이에게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무 대꾸가 없어."
아버지는 여기서 나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나가 그대로 두는 건 다른 대책이 없어서일까. 그것이 돈 문제인지 또 다른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누나가 들어왔다.
"아버지, 요양원 직원들에게 잘 부탁해놨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누나는 아버지가 제기한 문제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올 테니 편히 계세요."

사랑, 그 지난한 작업...
차에 오른 누나는 말이 없었다. 표정도 올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혹시 괜히 나를 데려왔다고 후회하는 건 아닐까.
신갈IC에 이르자 길이 밀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화제를 꺼내고 싶었다.
"누나, 궁금한 게 또 있어요."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니? 애처럼."
"궁금한 게 많다고요?ㅎㅎ 전 상대에게 끊임없이 궁금해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두 사람이 지금 좀 떨어져 있다고 가정해 봐요. 지금 이 시간뭐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음악을 듣고 있으면 무슨 곡인지, 왜 그 노래를 골랐는지, 그쪽은 폭설이라는데 눈이 오면 누굴 가장 먼저 떠올리는지 그 모든 게 궁금해지는 상태...."
"......."

누나는 듣고만 있었다.
"왜 사랑이 식는다고 하잖아요. 어찌 보면 어려운 말인데, 쉬운 말로 관심이 줄어들고 궁금한 게 없어지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상대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 증세.....그런 게 아닐까요."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게 사랑이라고?"
"잘 알면서 왜 그러세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잖아요."
"각자 자기 삶을 사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저마다 정의는 다르게 내릴 수 있겠죠. 어느 한 모양의 사랑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거 좋은 말이네. 사랑의 다양한 모양새....세모, 네모, 직사각형, 정사각형, 원, 구, 타원...

핸드폰, 진짜 있어요?
"근데 궁금하다는 게 뭐야?"
"...핸드폰요"
"핸드폰, 뭐?"
"핸드폰....사용하세요?"
"ㅎㅎ, 사용하느냐고? 글쎄....갖고는 있지."
"아, 일단 다행이네요. 나는 아예 없는 줄 알았어요. 지금껏 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이 정도면 철기시대 언저리라고 한 게 과장이 아닌 줄 알 것이다.
"그 번호 이젠 나에게도 알려줄 때가 되지 않았어요?"
"무슨 비상사태가 생기면..."
"비상사태요?"
누나는 핸드폰을 요양원 직원들과 아버지의 위급상황에만 쓴다고 했다.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의 비상벨은 그런 상황에만 쓰지만 전화는 꼭 그게 아니잖아요?"
그녀는 좀 더 생각해 보고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누나, 핸드폰 진짜 있어요? 있으면 어디 한번 보여주세요."
그 순간 그녀의 안색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게 지금 종의 태도야?"
"종이 뭐예요?"

나는 제대로 말대꾸를 했다. 6개월 만에 처음이었다. 여신과 시종의 관계는 언제 어떤 경우라도 불가변적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달라질 수 없는 것인가. 내가 스스로 제시한 관계였지만 시간과 상황과 따라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반항의 저변엔 요양원에서 꺼내달라는 아버지의 청을 외면하는 딸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으리라. 물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였지만 오늘 처음 본 그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내 마음을 계속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처음 본 내게 "여기서 좀 꺼내 달라"고 했을까.

그녀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인식한 것 같았다. 표정은 몹시 언짢았지만 입을 닫는 걸로 대신했다. 그런 상황이 한참 지속됐다. 10분, 아니 20분 이어졌을까. 나는 누나가 아버지의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신지 얼마나 됐어요?"
"왜? ......한 4년 정도 됐어..."
"거기서 잘 적응하고 계신가 봐요."
".....응 그런대로. 사소한 문제를 토로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면 잘 지내셔."

나는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전혀 다른 진단이었기 때문이다. 부녀간의 골 깊은 감정이 의사소통을 막는 건지, 아니면 아버지의 호소를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가끔 TV를 보면 요양원 직원들이 환자들을 막 대한다고 하던데 거기는 그런 문제가 없나 봐요."
"여긴 그런데 아니야. 돈이 얼만데...."
오늘은 이 정도에서 머물기로 했다. 부녀 문제에 아직은 깊이 개입할 때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동행에 대해서도 그녀는 아직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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