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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문명기행

『일본서기』의 오류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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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기록은 생명이다. 관 뚜껑이 덮일지라도 기록이 있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기록되지 않으면 끝내 희미해지고 만다. 제아무리 화려한 문명과 역사라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잊혀버린 철의 제국’ 가야처럼 말이다. 어째서 가야는 그토록 기록을 무시했을까. 고대국가들의 기록이 완전치는 않지만 어째서 고구려 같은 비문(碑文)조차 남기지 않았을까.

한국 침략의 명분 됐던 『일본서기』 #중국 사서 표현을 표절한 짜맞춤 #수많은 오류와 모순 찾고 지적해 #문명 원산지 지키기는 우리의 몫

아마도 끝까지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었으리라. 소국연합체로서는 어느 일국의 튀는 행동이 용납되기 어려웠을 수 있다. 역시 소국연합체였던 신라의 경우 중앙집권의 기틀이 마련되는 지증왕(재위 500~514) 이후 비문들이 등장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그래서 저마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정교한 철기와 토기 제품을 경쟁적으로 만들어냈으리라. 그것이 기록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으리라.

그래서 문헌학(文獻學)이 힘을 못 쓰는 자리에서 고고학(考古學)이 고군분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거짓된 기록의 시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그것은 가야를 망각의 심연으로 더욱 밀어 넣었다. 가야를 말할 때마다 거짓 기록의 망령이 출몰하니 아예 수장고 깊이 박아두고 끄집어내길 꺼려왔던 거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기록하는 자가 곧 승자이기도 한 까닭이다.

가야를 따르는 망령은 곧 『일본서기(日本書紀)』다. 『고사기(古事記)』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현존 역사서지만,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책이다. 하지만 각종 오류와 표절이 많아 스스로 신뢰도를 깎아내리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웅략(雄略) 9년 5월 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장군 기소궁숙녜는 용처럼 날래고 범처럼 노려서 사방을 둘러봤다.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들은 토벌하고 사해를 평정했다.”

신라에 원정했다 죽은 장군을 추모하는 천황의 말인데, 213년 후한의 헌제가 조조를 위공(魏公)으로 봉하는 책문과 똑같다. 『삼국지』 ‘위서 조조본기’ 원문은 이렇다.

“君 龍驤虎視 旁眺八維 掩討逆節 折衝四海”

『일본서기』는 여기서 군(君)만 대장군 기소궁숙녜(大將軍紀小弓宿禰)로 바꾸고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해 3월 기사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경남 함안의 말이산 13호 고분에서 국내 처음으로 발견된 덮개돌의 별자리 구멍. 남두육성을 비롯한 전통 별자리가 정확하게 표시돼 있다. 함안에 있던 아라가야는 일본과의 교섭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문화재청]

경남 함안의 말이산 13호 고분에서 국내 처음으로 발견된 덮개돌의 별자리 구멍. 남두육성을 비롯한 전통 별자리가 정확하게 표시돼 있다. 함안에 있던 아라가야는 일본과의 교섭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문화재청]

“신라 왕은 밤에 사방에서 관군의 북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탁지(경주)가 점령됐다고 믿고 수백 군사와 도주했다. (…) 탁지를 모두 평정했는데 남아있는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 이날 저녁에 대반담련과 기장전래목련은 모두 힘껏 싸우다 죽었다. (…) 얼마 후에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나자 관군 또한 물러났다. 대장군 기조궁숙녜는 병에 걸려 죽었다.”

경주를 평정했는데 정작 죽은 건 왜군 장수들이었다. 패잔병들이 물러났는데 승리자들도 후퇴한다. 이런 오류와 모순에 비하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표절인 ‘사방의 북소리(四面鼓聲)’ 정도는 귀여운 편이다.

이런 수준의 『일본서기』가 가야에 붙는 시비는 대략 세 가지 정도다. 우선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자 흠명(欽明)천왕이 분노를 터뜨린다.

“신라는 서쪽 오랑캐로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다. (…)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관가를 무너뜨려 우리 백성에 해독을 끼치고 우리 군현을 멸망시켰다. 우리 기장족희존은 (…) 신라가 궁지에 빠져 귀의한 것을 불쌍히 여겨 목이 떨어지려던 신라왕을 구하고 신라에 요충의 땅을 줘 번영하게 했다. (…) 그러나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임나를 침공해 멸망시켰고….”

이것 역시 『양서(梁書)』 <열전> ‘왕승변전’의 내용을 적당히 차용한 표절인데, 기장족희존이란 200년 삼한(三韓)을 정벌했다는 신공(神功)황후를 일컫는다. 그때의 『일본서기』 기사는 이렇다.

“풍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은 파도를 치게 했다. 큰 물고기들이 떠올라 배를 받쳤다. (…) 신라왕은 (…) 정신을 수습하고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이라고 한다. 성왕이 있는데 천황이라고 한다. 필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텐데 어찌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며 항복했다. (…)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왕도 소식을 듣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항복했다. 이로써 내관가(內官家)로 정했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이다.”

이 기록 역시 오류투성이다. 당시 신라왕은 파사 이사금으로 돼 있는데 그는 신라의 5대왕으로 재위기간이 80~112년이다. 200년에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신공황후는 49년 뒤 다시 백제와 함께 신라를 정벌하고 가야 7국을 평정하는데 이 땅을 모두 백제에 준다. 애써 얻은 땅을 남에게 주는 것도, 대군을 일으킨 한반도 원정이 중국의 사서에 한 줄도 언급돼있는 않은 것도, 황후가 100세까지 70년 동안 섭정해 후계자인 응신(應神)천황이 고희의 나이에 즉위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일본서기』가 백제 근초고왕의 행적을 차용해 신공황후를 창조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시대만 4세기로 옮긴다면 근초고왕의 업적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시조신 중 하나인 스사노오(素戔嗚尊)가 행실이 좋지 못해 하계로 쫓겨났는데 그가 내려와 다스린 땅이 신라였다는 내용이다. 이것 역시 모순투성이지만 일본의 한반도 침략 명분으로 훌륭한 역할을 해온 게 사실이다. 최근 일본학계에서도 점차 그 신화의 허구성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생각은 여전한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의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역사엔 원산지 표시가 없는 만큼 지켜야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가야에 기록이 없으니 『일본서기』에서라도 찾아 지켜야 한다. 571년 흠명천황이 죽으며 태자에 유언한다.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라. (일본과 임나가) 옛날처럼 화합해 다시 부부 같은 사이가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이것 역시 중국 사서의 표절인데, 속국이라면 부부 사이라고 했겠나. 그보다는 군신이나 형제라고 했을 터다. 임나와 일본이 동맹관계였다는 증거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