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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여론 따라 그냥 놔두자”가 연금 개편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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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승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승호 복지팀 기자

이승호 복지팀 기자

“절반 가까운 국민이 (국민연금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이를 무게 있게 받아들여 담았다.”

지난 14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부의 국민연금 개편안 4가지 중 1안을 ‘현행 유지’로 만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근거는 여론조사 결과다. 지난 9~10월 국민연금공단의 전화 설문 조사 결과 2000명 중 47%가 “현 제도를 유지하자”고 답했다. 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민간 연금전문가들과 함께 연금개혁 논의를 시작했다. 1년 넘는 노력의 결론 중 하나가 “여론을 따라 그냥 놔두자”인 것이다.

연금개혁은 흔히 ‘코끼리 옮기기’에 비유된다. 덩치가 크고 인기도 많아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국민의 여론을 살피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다른 나라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등의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부가 여론 조사 결과를 그대로 반영해 개편안으로 만든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저출산 고령화 흐름에 국민연금 기금 고갈 시점은 빨라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국민연금은 낮은 소득대체율로 ‘용돈 연금’이란 비판도 받는다. 정부가 ‘현행 유지’를 말하는 건 이런 국민연금을 고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공론조사를 좋아하는 정부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김상균 전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 위원장은 “학생 다수가 좋아한다고 수업을 하루 1시간으로 줄이고, 방학을 두 달로 늘릴 수 있느냐”라며 “정책 결정을 하다 보면 국민여론보다 전문가 의견을 더 반영해야 할 때가 있다. 국민연금이 그렇다”라고 말했다.

연금개혁은 정권을 내놓을 각오로 하는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연금 개편에 나섰다가 다음 선거에서 져 자리를 내놔야 했다. 하지만 연금개혁은 두 정상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은 제도발전위원회의 자문안이 언론에 공개돼 반발이 커지자 “국민 동의와 사회적 합의가 없는 연금개편은 없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이 이런 사인을 주니까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여론조사 결과를 내세우며 ‘현상 유지’를 첫 번째 대안으로 내놨다.

연금개혁의 역사에서 국민이 쉽게 동의한 사례는 별로 없다. 어느 나라든 ‘더 내고 덜 받는’ 식의 연금개혁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도 후손을 위해 칼을 빼야 하고, 이를 위해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여론 조사로 정책을 추진할 게 따로 있다.

이승호 복지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