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의 레저터치
2018년은 『목민심서』 저술 200주년이다. 대한민국 고위 공직자치고 『목민심서』를 거론하지 않는 자 없으니, 뜻깊은 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다른 이유로 올해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떠올린다. 전남 강진에 유배됐던 다산이 경기도 남양주 집으로 돌아간 해가 1818년이다. 2018년은 다산의 해배(解配) 200주년이다.
다산이 강진에 도착한 날짜는 1801년 음력 11월 22일이다. 양력으로 올해는 12월 28일이니 얼추 이맘때다. 귀양길의 다산은 몸도 마음도 성치 못했다. 포도청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고문 끝에 천주교를, 아니 가족을 배신했다. 매형 이승훈과 조카사위 황사영의 죄목을 일러바쳤고, 천주교인 색출법을 알려주었다. 그 대가로 목숨을 부지했다.
다산은 강진읍성 동문 밖 주막에 겨우 거처를 얻었다. 다들 대역죄인이라며 줄행랑을 칠 때 늙은 주모만 받아주었다. 천장 낮은 행랑채에서 다산은 허구한 날 무뢰배들의 술주정에 시달리며 잠이 들었다. 주막에서 그는 꼬박 4년을 버텼다.
밤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권력자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렸으니 억울하고 분했을까. 집안마저 풍비박산 난 제 처지가 서글펐을까. 아니면 주막에 빌붙어 연명하는 하루하루가 참담했을까. 2주일 전. 옛 주막 뒤편에 들어선 한옥 민박에 몸을 뉜 채 나는 200년 전 다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생각했다.
다산은 500권이 넘는 저작을 남겼다. 『목민심서』처럼 후세가 길이 기리는 역작도 수두룩하다. 하나 나는 아동용 교재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에서 다산의 딱한 그러나 독한 의지를 읽는다. 주막에서 그는 손수 교재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왕을 가르치던 그가 시골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다산은 밥을 벌었다. 체면 따위는 그의 귀양살이에서 없었다. 다산은 행랑채를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용모·언어·동작 네 가지를 반듯이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결국 저 자신을 향한 담금질이다.
‘이제 너희는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나는 울컥했다. 아들에게 ‘망한 집안의 자손’이라고 자백하는 아비의 심정이 눈에 밟혀서였다. 편지를 읽으며 나는 다산이 귀향의 꿈을 접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재회를 기약했다면 이렇게 모진 언어를 부릴 수 없다. 자식에게는 더욱더.
서른아홉 살에 고향을 떠났던 다산은 쉰여섯 살에 돌아왔다. 17년 10개월 만의 귀향은 200년 전 음력 9월 2일 시작되었다. 양력으로 올해는 10월 10일이다. 고향에서 다산은 세상과 연을 끊은 채 18년을 더 살았다.
문득 세상이 나를 등지고 돌아섰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200년 전 한 사내가 견뎌낸 18년 세월을 되새긴다. 세상으로부터 홀로 내팽개쳐진 사내의 처연했던 아니 처절했던 일상이 강진 땅 곳곳에 묻어 있다. 번듯하게 재현한 초당도 있지만, 늙은 팽나무 여전한 주막도 있다. 주막에서 지금도 아욱국을 판다. 200년 전 사내가 한입 뜨며 화를 삭였다는 그 아욱국 말이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