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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재승의 퍼스펙티브

유럽 스마트도시들은 느리지만 탄탄하게 진화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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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유럽 스마트도시들 둘러보니 

인구 62만 명의 작은 도시 로테르담.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유럽 최대 무역항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공습으로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지만, 전후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다. 덕분에 로테르담은 네덜란드 건축의 메카가 되었다.

에인트호번, AI로 교통 관리하려 #3년 동안 경찰청 설득 작업 #암스테르담, 외부 영입 전문가가 #시의 스마트도시화 진두 지휘 #유럽, 이해 관계자들 합의 중시 #시 정부는 이해 중재에 힘써 #한국, 빠른 추진이 장점이지만 #이해 관계에 막히면 진퇴양난

이곳에는 스타트업과 기업 연구소들이 함께 자리한 혁신 클러스터가 항구 근처에 있는데, 자율주행 셔틀이 이곳을 가로지른다. 파크셔틀(parkshuttle)이라 불리는 이곳 자율주행 셔틀은 운전자 없이 운행되며 중앙관제시스템에서 관리·운영·통제한다.

요금은 1000원 남짓. 놀라운 것은 이 자율주행 셔틀을 운행하는 기업이 이곳에서 자율주행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한 때가 무려 30년 전이라는 사실이다. 시 정부가 지난 30년간 약 500억원을 꾸준히 지원해 자율주행 셔틀을 현실화할 수 있었고, 이제는 기업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난달 11~22일 국토교통부와 제4차산업혁명위원회 관계자들과 함께 유럽의 스마트도시 방문 길에 본 로테르담의 모습이다.

스마트도시란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움직임, 시민 행동들을 데이터화해 인공지능을 통해 분석, 도시인들의 삶의 질과 행복을 높이는 맞춤형 예측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으로서 도시를 뜻한다. 스마트도시의 핵심 철학은 도시를 시 정부나 시행사·건설사 등 공급자 중심에서 벗어나, 시민 중심의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왜 스마트도시 만들려 하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미래 도시는 시민들이 직접 도시 문제를 발굴하기도 하고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도록 해주는 것이 시민 행복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 교류를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마트 기술은 이를 저비용으로 가능하도록 도와주고 시민들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읽는 데 사용된다.

유럽의 대표적 스마트도시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22@지구가 있다. ‘22아르바’라고 읽는 이곳은 정보통신·미디어·디자인·에너지·의료기술 등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의 대표적 도시재생형 산·학·연·관 혁신 클러스터다. 이곳에선 도시 전체에서 무료로 와이파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무료 전기자동차 충전기, 스마트 쓰레기통, 오토바이 공유, 쓰레기 소각열을 활용한 에너지 생산 등이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다.

바르셀로나 시는 무료 와이파이 이용자의 빅데이터를 수집·분석해 시스코(CISCO)·아마존과 함께 시민들을 위한 공공서비스로 활용한다. 또 ‘슈퍼블록 프로젝트’(Superblock project)를 통해 일정 구역의 도로에 차량 진입을 제한하고, 녹지와 시민 교류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살고 싶은 도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22@지구에서 주목할 점은 시민들이나 스타트업·중소기업들이 자유롭게 참여해 도시 혁신을 위한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지원한다는 점이다.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 리빙랩(시민 참여형 도시 문제 해결 프로젝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것은 스마트도시의 대표적 모범사례다.

스마트테크로 지속가능한 도시 만들기

도시인들이 출퇴근에 소모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100분(1시간 40분). 서울 거주 직장인들의 경우에는 무려 134.7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단연 1등이지만, 교통 체증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유럽 도시들도 앓고 있는 사회문제다. 매연으로 인한 공기 오염, 과도한 화석연료 사용 등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도시 문제도 심각하다.

게다가 도시를 운행하는 자동차의 96%는 주차장에서 쉬고 있다. 도시의 자동차들이 온종일 집이나 직장 주차장에 주차된 현실을 해결해야 한다.

노르웨이는 저탄소정책의 하나로 정부에서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한 다양한 무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전기차를 사용하면 등록세는 물론 통행료·주차료·충전료 등을 전액 감면해준다. 노르웨이는 전기차 보급률이 세계 1위다.

전 세계가 스마트도시 열풍인 이유는 혁신적 경제생태계를 만들어 일자리도 창출하고 도시 문제도 기업의 도움을 얻어 해결하려는 데 있다. 사회 혁신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도시는 오랫동안 서서히 진화하는 것이라, 도시계획가의 머리에서 모든 것이 설계될 수 없다. 기업이 만든 혁신적인 서비스와 제품으로 도시 문제가 해결되고 시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 민간의 도움을 얻으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의 혁신클러스터 브레인포트(Brainport)나 암스테르담의 ‘스타트업 암스테르담’(StartupAmsterdam)은 유럽 스타트업의 중심지로 진화하고 있다.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공용 공간도 제공한다. 한국 등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시 정부가 도와준다.

스타트업들은 최우선으로 도시민 문제를 파악해 스마트 기술로 이를 해결하려고 애쓰며, 그 덕분에 기업도 성장한다. 지열·수열을 활용한 냉난방 시스템 개발, 세계 최초 비콘 리빙랩으로 사물인터넷으로 장거리 데이터 전송, 에너지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조회해주는 스마트홈 시스템 도입 등이 모두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혁신적인 젊은이들의 스타트업이 낙후된 도시를 새롭게 탄생시키고 있다.

세계 스마트시티에서 얻은 교훈

스마트도시를 운영하는 시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나눈 대화에서 그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시 정부와 기업이 함께 협력해 도시를 운영하는 정부-민간 파트너쉽(Public-private partnership)이다. 시 정부는 정보기술(IT)·바이오기술(BT)·에너지기술(ET) 등을 잘 알지 못하고 이를 운영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외부에서 최고기술경영자(CTO)를 영입해 시 정부 내 스마트도시를 진두지휘하게 한다.

새로운 도시 서비스의 등장은 늘 기존 서비스 주체들과의 이해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도시의 자동차 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소유차 중심에서 벗어나 차를 나눠 쓰는 공유차 서비스의 확대가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비스의 등장은 택시업계 등 기존 사업자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민들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공유 기반 경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유럽 도시의 시 정부는 민간 기업들 사이에서 이를 중재하고 합의를 끌어내는 노력의 주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에인트호번 시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교통의 흐름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경찰청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무려 3년이나 그들을 교육하고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기술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그 혜택이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교육하면 그들도 인정하고 합의점을 찾으려고 애쓴다는 것이 시 정부의 전언이다.

얼핏 유럽 스마트도시의 외형이나 서비스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한국이 더 빠르게 추진하고 조만간 구체적인 성과를 낼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유럽 도시의 시 정부는 이해 당사자들 간의 합의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시 정부가 이를 중재하고 해결하는 주체로서 적극적이기에, 느리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데이터가 중요

유럽의 스마트도시 시 정부가 내놓는 스마트도시의 성공 전략은 결국 ‘데이터와 인공지능’이다. 시민들의 요구를 읽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이 원할 것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에 관한 데이터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스마트도시는 다양한 도시 데이터를 얻기 위해 공을 들인다.

지난 11월 중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스마트도시 국제회의( SCEWC 2018)에선 800여개 전시 부스와 400여 개의 발표가 있었는데, 사물인터넷으로 데이터를 측정하고 클라우드 시스템을 활용해 저장하며 인공지능을 활용해 분석하는 플랫폼 소개가 대부분이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는 데이터거래소까지 생겨났다. 시 정부는 물론 기업들이 얻은 데이터를 서로 거래해 데이터 분석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는 데이터 규제가 필요하지만, 공공서비스 개선을 위해서는 데이터 활용이 절실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현명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설명한다.

데이터를 플랫폼 위에 올려놓고, 인공지능으로 그것을 분석해 도시서비스를 제공해야 비로소 스마트도시가 된다. 아직 우리나라엔 이런 도시가 없으며, 유럽마저도 인공지능 적용은 초기 수준이다. 이해 관계자들도 많고, 만약 서비스에 문제가 생겼을 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실험해 보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으니, 시행착오들은 좋은 서비스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선택과 집중’에서 ‘연결과 융합’으로

유럽 스마트도시의 특징은 중앙정부가 아닌 시 정부가 주도한다는 것이다. 지자체들은 도시마다 하나의 테마를 정해 그 서비스와 기술에 주력한다. 모빌리티·에너지·도시재생·교육·헬스케어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들이 한국의 스마트도시 국가 시범 도시 세종을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하나의 도시에 모빌리티·에너지·교육·헬스케어·거버넌스·문화·쇼핑 등을 한꺼번에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이다. 실제로 에너지 데이터는 모빌리티 데이터와 결합하면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헬스케어와 교육 데이터는 거버넌스에 필수적이라서 둘을 결합하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에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도 있다”고 말했더니, 도시는 선택과 집중을 해서는 안 되는 총체적인 공간이라는 것이 돌아온 답변이었다. 모빌리티·에너지·교육·헬스케어·거버넌스·문화·쇼핑·일자리에서 어느 것 하나 챙기지 않아도 되는 도시는 세상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오히려 ‘연결과 융합’이 도시의 미래라는 얘기다. 이제 우리도 자신감을 갖고 출발하면 된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