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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도, 얼굴도 없는 살인범···걸음걸이로 잡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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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본지 이태윤 기자가 얼굴을 가리고 가상 범행시나리오에 맞춰 걷고 있다. [중앙포토]

본지 이태윤 기자가 얼굴을 가리고 가상 범행시나리오에 맞춰 걷고 있다. [중앙포토]

범행 현장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유전자(DNA)를 남기지 않은 범인을 과연 검거할 수 있을까.

3년 전 금호강 ‘얼굴없는’ 용의자 #휜다리·팔자걸음이 결정적 증거 #모의범죄 기자의 보행 분석하니 #보폭·관절동작 실제와 90% 일치

지난 6일 서울 중구의 한 도로. 미리 주차해둔 차량에 기자가 다가섰다. 두꺼운 목도리로 얼굴을 대부분 가렸다. 가상 범행 시나리오에 맞춰 차량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해당 장면은 폐쇄회로(CC)TV와 비슷한 각도로 맞춰 설치된 카메라로 촬영했다. 기자가 빠른 걸음으로 걷는 모습이 영상에 포착됐지만, 얼굴은 목도리에 가려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 영상을 경찰청과 협력해 용의자의 보행을 분석하고 있는 분당서울대병원의 동작분석실 ‘디딤’으로 가지고 갔다. 연구원들은 먼저 기자의 키를 측정한 뒤 실제 걸음걸이 분석에 돌입했다. 동그란 알루미늄 소재의 표지자(Marker) 29개를 기자의 머리, 골반, 종아리, 무릎 등에 부착했다. 평소 걸음걸이로 10m의 거리를 반복해 걸었다. 분석실의 설치된 동작인식 카메라 9대가 기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촬영해 분석 프로그램에 전송했다.

분당서울대병원 동작분석실 '디딤'에서 이태윤 기자가 법보행분석을 위해 표지자 등을 몸에 부착하고 있다. [중앙포토]

분당서울대병원 동작분석실 '디딤'에서 이태윤 기자가 법보행분석을 위해 표지자 등을 몸에 부착하고 있다. [중앙포토]

법보행분석을 위해 약 10m를 왕복해 걸었다. 몸에는 동작 인식을 위해 알루미늄 소재의 표지자를 부착했다. [중앙포토]

법보행분석을 위해 약 10m를 왕복해 걸었다. 몸에는 동작 인식을 위해 알루미늄 소재의 표지자를 부착했다. [중앙포토]

분석실의 컴퓨터 화면에는 어느덧 기자의 ‘3D 인체 모형’이 구현됐다. 연구원들이 모형을 시상면(측면), 관상면(정면), 횡단면(윗면)의 시점으로 나눠 각각 보폭과 근육, 관절의 움직임 등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동작분석실 유미선 연구원은 “사람마다 어깨와 골반 사이의 거리, 보폭, 보행 시 각 관절의 움직임 등 걸음걸이가 모두 미세하게 다르다”며 “이를 수치화한 뒤에 CCTV 등에 포착된 용의자의 걸음걸이와 비교하면 동일인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기자의 걸음걸이(왼쪽)와 동작분석실에서 구현한 인체모형의 걸음걸이(오른쪽). [중앙포토]

실제 기자의 걸음걸이(왼쪽)와 동작분석실에서 구현한 인체모형의 걸음걸이(오른쪽). [중앙포토]

분당서울대병원 동작분석실 연구원들이 컴퓨터 화면에 구현된 기자의 인체 모형을 분석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분당서울대병원 동작분석실 연구원들이 컴퓨터 화면에 구현된 기자의 인체 모형을 분석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실제 동작분석실에서 분석한 걸음걸이와 앞서 촬영한 가상범행 영상 속 기자의 걸음걸이를 대조해보니 신장, 보폭, 관절의 움직임이 90% 이상 일치했다. 유 연구원은 “팔자걸음, 안짱걸음 등 용의자의 걸음걸이가 특이하다면 더 신속하게 분석을 완료할 수 있다”고 했다.

원세훈 자택 화염병 투척 사건 때 처음 도입 

이처럼 사람의 걸음걸이를 분석해 범인을 밝혀내는 과학수사 기법을 법보행분석(Forensic Gait Analysis)이라고 한다. 경찰은 대다수 범죄를 용의자의 DNA나 얼굴을 포착해 해결하는데, 범죄 현장에 얼굴과 DNA가 남지 않으면 ‘최후 수단’으로 법보행을 수사에 활용한다.

법보행이 국내 수사에 처음 도입된 것은 2013년이었다. 그해 5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자택에 누군가 화염병을 투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CCTV에는 피의자의 얼굴 대신 걸음걸이만 포착됐다. 경찰에선 영국의 법보행 전문가인 헤이든 켈리 박사를 초청해 피의자의 걸음걸이를 분석했고, 이를 토대로 용의자를 확인해 구속영장도 발부받았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담당자의 실수로 CCTV 원본을 재촬영해 분석한 영상과 원본 영상의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아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하지만 경찰에선 법보행이 향후 수사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판단, 2014년 전문의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협의체를 구성했다. 협의체에서는 14년 26건, 17년 31건, 올해 10월 기준 17건 등 총 140건의 보행을 분석해 일선 수사팀에 제공해 범인 검거를 도왔다.

법보행은 강력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로도 활용됐다. 2015년 대구 금호강 살인사건이 대표적이다. 박모(32)씨가 보험금을 노려 고향 친구 윤모씨를 살해한 사건인데, 살인 현장에는 박씨의 DNA 등 직접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인근 CCTV에서 윤씨와 함께 걸어가는 남성이 포착됐고, 화질이 나빠 얼굴은 분간할 수 없었지만 휘어진 다리와 팔자걸음이 확인됐다. 경찰은 화면 속 걸음걸이와 박씨의 실제 걸음걸이를 대조해 일치한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고 재판에서 증거로 인정됐다. 2016년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박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CCTV 등에 금호강 살인사건 용의자의 모습.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CCTV 등에 금호강 살인사건 용의자의 모습.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법보행 전문가협의체 위원인 이상형 동국대일산병원 교수는 “경찰청과 함께 CCTV 화면 왜곡을 보정해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도록 하거나, 각종 보행 연구데이터를 확장하는 연구·개발(R&D)을 진행하고 있다”며 “전국에 설치된 수백만 대의 CCTV가 모두 범인의 걸음을 포착하는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손국희ㆍ이태윤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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