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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세계 시한폭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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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내셔널팀장

염태정 내셔널팀장

지하 통신구로 연결되는 철문을 열자 지름 50~60㎝ 돼 보이는 검은색 케이블이 층층이 쌓여 길게 뻗어 있었다. 흐릿한 불빛 아래 케이블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는데 영화 속 세계에 들어온 듯했다. 계속 걸어가면 어릴 적 읽었던 소설 『지저세계 펠루시다』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상상도 했다. 안내를 맡은 KT 직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통신구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정말 큰일 난다”고 했다.

최근 줄줄이 터진 서울 KT 아현지사 지하통신구 화재, 경기도 고양 지하 온수관 파열 사고를 보면서 10여 년 전 갔던 서울 광화문 지하 통신구가 떠올랐다. 통신선과 온수관·가스관을 비롯해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지면 편리해질수록 땅 밑에는 더 많은 설비가 깔려야 한다. 인프라 설치뿐 아니라 지하 개발도 확대일로다. 서울시는 광화문·시청역·을지로·동대문을 잇는 지하 공간 개발을 추진 중이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세계 최대 지하도시 언더그라운드 시티를 본뜬 사업이다.

지하 공간 활용·관리는 점점 중요해지는데 현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시설에 따라 관리 주체가 국토교통부·행정안전부·지방자치단체 등 제각각이다.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지 않다. 2014년 전국 곳곳에서 지반 침하가 발생하자 정부는 이듬해 4월 효과적인 지하 설비 관리를 위해 ‘2019년까지 지하 공간 통합 지도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년 구축은 물 건너갔고 202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통합지도는 실제 측정이 아닌 기존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것도 많아 정확도에 대한 의심도 있다. 인프라 설비뿐 아니라 건축물의 토대가 되는 지하의 토층·암반층 정보도 필요한데, 역시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 9월 서울 상도유치원 붕괴는 지반 정보를 제대로 몰랐거나 알면서도 무시한 결과다.

지하 공간에 대한 시민의 불안은 커진다. 땅속을 제대로 관리해 달라는 요구가 높아진다. 서울시의회에서는 10월 ‘서울특별시 지하안전관리에 관한 조례안’이 나왔다. 지반침하 및 지하시설물의 종합적인 안전관리체계 수립이 골자다. 전북도의회에서도 최근 ‘지하안전관리에 관한 조례’가 발의됐다. 땅밑 설비가 상대적으로 많은 산업도시 울산광역시에서는 이달 중 ‘지하안전위원회’가 출범할 예정이다.

지자체들이 땅속 관리를 위한 조례를 만들고 안전위원회를 구성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근 줄 이은 사고에서 보듯 국가 차원의 지하 안전관리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지하는 깜깜한 곳이지만 정보마저 깜깜해서는 안 된다. 땅 밑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관리해 지하설비가 시한폭탄이 되는 건 막아야 한다.

염태정 내셔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