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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얼마나 정숙한지 내 차 한번 타 볼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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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11화

엉겁결이라고 역사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역사는 우연의 축적일지 모른다. 사소하면서도 의도치 않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 역사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와중에 가끔은 기념비적 사건도 끼어들고. 얼마 전 우리가 서로의 몸을 확인했던 것처럼. 그녀의 몸은 단단하고 탄력적이었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가냘픈 몸매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 밖이었다.

"누나, PT 받고 있어요?"
"가끔 받긴 하지만 기본 체형은 중학교 때 만들었어. 나를 지키기 위해 운동 열심히 했거든."
그녀는 언제나 내 생각 너머에 있었다. 이날 갑자기 나와 자고 싶다고 한 것이나 중학교 때 이미 몸만들기에 열중했다고?
-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란 뭘까.....
궁금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그 달콤한 분위기가 괜히 변색되면 안 되니까.

첫 섹스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 나이까지 오면서 이런 일이 몇 번 있었지만 단연코 특별했다. 나의 드림걸이었기에 심리적으로 더욱 고양됐을 것이다. 그녀가 전에 결혼생활을 잠깐 언급하면서 복무라는 단어를 썼고, 하기 싫은 섹스였다고 말한 적 있다. 그 뒤 나는 그녀가 섹스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걱정해 왔다. 이 생각도 틀렸음을 분명히 확인했다.
-누나가 날 싫어하지 않는구나.
섹스도 섹스였지만 이것이 이날 가장 큰 소득이었다.

섹스가 중요한 이유
그날 이후 그녀의 눈빛은 확실히 부드러워졌다. 냉소적인 말투도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허물지 않는 원칙 하나가 있었다. 글공부에 관한 것이었다. 전과 같이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이 이어졌지만 엄격한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11월 둘째 수요일 수업 주제는 '중언부언하지 말라, 같은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차의 정숙성은 기분 좋은 엔진과 배기음만 살짝 유입될 정도로 다른 잡소리는 듣기 어렵다.
이 예문을 놓고 선생님은 무엇이 문제인지 물었다.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지 않아요."
"또?"
"정숙하다는 말과 다른 잡소리는 듣기 어렵다는 것이 같은 말인 것 같은데요."
"좋아. 어떻게 고쳐 쓰면 될까?"

나는 이렇게 고친 글을 보여줬다.
-이 차는 기분 좋은 엔진과 배기음만 살짝 유입될 정도로 정숙하다.
선생님은 엔진이 유입된다는 말은 없기 때문에 엔진 소리라고 써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정숙하다는 단어가 틀린 건 아니지만 자동차라는 일상적인 물건에는 그와 어울리는 일상적인 표현인 조용하다가 더 낫겠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디테일에 강했다. 토씨 하나, 단어 하나, 표현 하나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래 문장을 최종 선택했다.
-이 차는 기분 좋은 엔진 소리와 배기음만 살짝 유입될 정도로 조용하다.
그녀는 만족해했고, 수업은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그 틈을 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차는 어때요?"
"주제와 관련된 질문만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수업 중엔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그대로 요구했고, 사담 금지도 마찬가지였다.
10분 정도 더 지난 뒤 나는 오늘 수업은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선생님은 아직 아니라며 가방에서 A4용지 두 장을 꺼냈다.

=혹시 제 이름 기억하시나요?
저번에 커피 자판기 앞에서 제가 바로 뒤에 서서 잠깐 말을 걸었는데 기억하세요?
그때 이름을 말했는데 혹시 알고 계시나요?
사람들을 처음 만나 김천이라고 하면 다들 이름이 아니라 고향부터 소개하시네요, 하면서 재미있어한다고 했는데 기억하시나요?
그쪽에선 전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저는 제헌절 하루 전인 7월 16일 이 디지털도서관에서 처음 그대를 만났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보낸 첫 메일의 앞부분을 프린트한 것이었다.
“아, 지금 보니 너무 쑥스럽네요. 근데 이건 왜...."
"왜긴 왜야. 오늘 교재니까."
나는 무슨 교재가 이렇게 사적인 편지냐고 따졌고, 그녀는 세상의 모든 글은 글방의 교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여친으로 그녀의 신분은 바뀌었지만 그녀를 이기는 일은 여전히 불가능해 보였다.
“내 첫 메일 받고 기분이 어땠어?"
갑작스런 질문에 머뭇거리자 그녀는 한마디 더 했다.
“69점 말이야. 왜 내가 그렇게 박한 점수를 준 지 알아?"

여친이 됐지만 달라지진 않았다
선생님은 첫 네 문장 중 세 개의 술어가 기억하느냐고, 나머지 하나도 아느냐로, 결국 네 문장 술어가 다 같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다음은 아예 읽고 싶지 않았지만 글이 길지 않아서 마저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이것도 매우 중요한 거야. 첫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이름을 말했는데 기억하느냐, 왜 못 기억하느냐,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상대가 좋아하겠어? 그것보다는 아마 기억 못 하겠지만 저는 김 아무개입니다, 라고 정식으로 인사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지만 기분은 영 아니었다.
-아니, 우리 사이를 원점으로 돌리자는 건가.

아무리 수업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았다.
나는 당혹스러웠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도를 나갔다.
"그리고 7월 16일 처음 무명씨를 만났습니다, 라는 문장도 좀 어색해."
나는 뚱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서도 술어가 잘못됐어. 만났다는 건 상호적인 거야. 누가 누구를 만났다고 하면 만남을 공유했다는 뜻이지. 그런데 이날 너는 나를 처음 발견했을 뿐이야. 처음 무명씨를 보았습니다, 또는 발견했습니다, 라고 써야 하는 거야.
.....어이, 학생! 일그러진 얼굴 좀 풀지.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단어가 이어져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이면 글이 되는 거야. 그러니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것이 좋은 글의 출발이야. 알았지? 오늘 수업 끝!"

그녀는 마침 오늘 차를 갖고 왔으니 같이 타고 저녁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얼마나 정숙한지 내 차 한번 타 볼래? 글 못 썼다고 한참 깨졌으니 기분은 좀 풀어줘야지. 호호"
"그런데 왜 이번엔 정숙이에요?"
난 일부러 삐딱하게 물었다.
"그건 타 보면 알아. 조용한 것과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에 반어적으로 그렇게 말한 거야."
글이나 말로 그녀를 이기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나는 차가 없었다. 3년 전 아반떼를 타다가 접촉사고를 낸 뒤 팔아버리곤 다시 장만하지 않았다. 사실 서울이란 도시는 차 없이 사는 데 별 불편함이 없다. 지하철이 워낙 잘 돼 있으니까. 술 한잔하고 지하철도 끊긴 시간, 택시 잡는 일을 빼고는.
비록 차는 없지만 대부분의남자들처럼 나도 차에 관심은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노란색 벤츠 쿠페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입에 올렸다. 그녀의 소유물에 내가 무슨 욕심이라도 가진 것처럼 비치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일종의 결벽증일까, 하여튼 그랬다.
처음 차 얘기를 꺼냈는데 바로 타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부~웅~~~
시동 거는 소리를 들으니 바로 AMG 엔진임을 알 수 있었다. 다운됐던 내 기분도 4초 만에 시속 100km에 도달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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